[김명환의 씨네 칵테일] '킹스 스피치'의 말더듬병 다스리기

말을 심하게 더듬는 영국 왕 조지 6세의 이야기를 다룬 ‘킹스 스피치’(The King's Speech)는 올해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 수상작입니다. 그런데 국내 시사회 반응은 의외로 ‘차분’했습니다. 관객 중엔 고개를 갸우뚱한 사람도 있습니다. “아카데미가 과대평가한 것 아니냐”는 말도 나왔습니다.

어려움을 가진 인간의 이야기라는 설정은 ‘인간 승리 드라마’를 유독 편애하는 아카데미의 당연한 선택일 수 있지만, ‘킹스 스피치’는 사실 눈물이 핑 돌 만한 감동을 안기는 영화는 아닙니다. 톰 후퍼 감독의 연출은 드라마틱한 전개로 관객들을 짜릿하게 만드는 대신 대체로 평탄하고 무난합니다.

사실 1930년대에 영국 윈저공의 스캔들은 들은 적 있지만, 같은 시기 영국에 말을 더듬는 왕이 있었다는 건 이 영화보고 처음 알았습니다. 알버트(콜린 퍼스)가 1939년 스캔들 때문에 왕위에서 하차한 형에 이어 왕이 되니 말더듬증 증세는 더 큰 문제가 됩니다. 하필이면 나치즘과 파시즘의 준동으로 전쟁의 먹구름이 밀려오고 있어, 영국 국민을 하나로 묶을 연설이 필요한 때에 연설에는 최악인 왕이 오르는 역설이 빚어진 거죠.

이 구석의 소재를 발굴해낸 ‘킹스 스피치’는 굴곡 많은 드라마를 빚기보다는, 영국 왕이라는 매우 예외적인 개인을 파고들며 ‘인간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정말로 필요한 게 무엇인가’라는 원초적인 물음을 조곤조곤 던집니다. 말을 심하게 더듬는 영국 왕족이 그 장애를 치료해보려는 과정이 그런 물음을 떠올리게 합니다.

알버트는 세계적 대국의 최상층에 속해있는 왕자이지만 말을 더듬어 행복하지 않습니다. 치료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아내 엘리자베스의 주선으로 만나게 된 괴짜 언어치료사 라이오넬 로그(제프리 러시)와의 만남이 알버트의 삶에 생각지도 못했던 지평을 열어주기 시작합니다.

우선 로그는 말더듬증을 마음의 병으로 바라봅니다.
알버트의 어려움을 ‘몸’의 이상으로 여겨 구슬 따위를 입에 물게 시켰던 궁정 치료사와는 정반대였죠. 로그는 모든 신경정신과 의사들이 그러하듯이, 환자 알버트의 유년기 기억을 파고듭니다. 그 카운슬링 같은 치료과정에서, 겉으로는 남부러울 것 없어 보였던 이 왕족 사내가 중년까지 살아오면서 겪은 정신적 속박과 영혼의 고통이 하나하나 물 위로 떠오릅니다.

소년은 그 좋아하는 모형 만들기는 손도 못 대고 어릴 때부터 궁정의 엄격한 규율을 지켜야 했습니다. 주변에 사람은 많지만 무조건 근엄한 아버지나 플레이보이인 형 같은 가족들 사이에서 마음을 터놓을 사람조차 없었습니다. 특히 서너 살 때부터 형만 편애하고 어른 몰래 알버트를 꼬집어대던 유모가 소년 알버트를 말더듬이로 몰아간 환경의 하나가 되었음도 드러납니다. 알버트의 자아는 어릴 적부터 왕실의 억압적 규율 속에서 억눌리고 결국 말을 더듬게 됐다는 점이 점차 명확해집니다.
‘마음대로 내질러보라’는 로그의 주문에, 알버트가 내뱉는 말들이 f 자로 시작하는 육두문자를 비롯한 온갖 상소리라는 대목은 그 억압의 성격을 말해줍니다.

실타래처럼 얽힌 알버트 마음속 매듭을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단연 부각되는 것은 기인의 풍모를 지닌 언어치료사 로그의 캐릭터입니다.
셰익스피어 극의 연기에 심취해있는 연극 애호가이기도 한 로그는 전문학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수많은 치료 경험’이 있을 뿐이지만 어려움 있는 인간을 꿰뚫어 보는 카리스마가 왕을 압도할 정도입니다. 로그는 알버트가 영국 왕 조지 6세로 즉위한 후에도 알버트에게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습니다. 왕가의 친한 가족들끼리만 쓰는 애칭인 ‘버티’로 알버트를 부르며 친구처럼, 혹은 가족처럼 그의 고민과 마주하려 합니다. 알버트는 그런 로그의 태도에 불쾌함을 표시하지만, 실은 아주 오랫동안 결핍되었던 갈망이 채워지고, 사람냄새를 맡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결국 알버트와 로그는 왕족 대 치료사가 아니라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가 됩니다. 로그 앞에서 알버트는 대영제국 왕이 아니라 의지와 무관하게 왕가에 태어나 어려움을 겪으며 자란 한 사내일 뿐입니다. 이렇게 로그는 단순히 언어 장애를 다스리는데 그치지 않고 한 나라를 이끄는 용기를 주게 됩니다.

베토벤 교향곡 7번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진행되는 라스트의 생방송 연설 신에서 조지 6세와 로그가 어울려 빚어내는 모습은 두 사람이 빚어내는 하모니의 절정을 이룹니다. 그것은 완벽하지 못한 세상의 모든 이들을 외면하지 않고, 관심을 갖고 다가갑니다.

영화는 2차대전의 전운(戰雲)이 꿈틀거리던 어지러운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큰 역사를 보여주기는 대신 역사가 소용돌이치는 심장부인 영국 왕실의 개인사를 통해 세상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그 시기는 혼란의 시대일 뿐 아니라 근대의 여명기(黎明期)이기도 합니다. 왕실의 절대 권위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고, 라디오 마이크 앞에 서는데 신경이나 쓰는 대중 쇼의 주인공으로 바뀌는 등 거대한 변화들이 싹트는 시대의 분위기를 맛보는 것도 양념 같은 재미입니다.
휴먼 드라마에 고급스러운 유머까지 곁들인 이 영화는 자극적인 화려함을 절제한 대신, 시쳇말로 ‘장인이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삶의 다양한 풍경을 직조해 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