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사람 더 울리는 물가

서울 신림동의 기초생활수급대상자 최모(74)씨는 지난겨울을 나기가 힘들었다. 우선 보일러 등유 지출비가 월 25만원에서 30만원으로 늘었다. 등유 값이 작년 3월 L당 1042원에서 올해 3월 1303원으로 25%나 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소득층은 상황이 약간 달랐다. 고소득층이 많이 사용하는 지역난방요금은 작년 8월 평균 3.95%, 지난달엔 평균 1%가 내렸다.

네 식구 월 소득이 200만원인 박모(41)씨는 최근 식비로만 한 달에 50만~60만원을 쓴다. 박씨는 "1년 전만 해도 한 달에 30만~40만원이면 됐는데, 요즘은 쌀과 배추, 양파, 마늘 등 어느 하나 안 오른 게 없어 요샌 옷값을 줄여 장을 본다"고 말했다. 반면 남편과 맞벌이로 월 700만원 소득을 올리는 서울 목동의 김모(42)씨는 지난 9일 집 근처 백화점 지하의 식품 매장을 찾았다가 500g짜리 팩 포장 딸기 2팩을 1만원에 묶어 파는 걸 보고 손이 갔다. 김씨는 "평소 백화점에서 1팩에 7000원에 팔던 것인데, 묶어 팔면서 1팩에 3500~4000원 하는 대형 마트와 가격이 엇비슷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소득 하위 20%의 체감 물가가 상위 20%보다 0.9%P 높아

저소득층의 체감(體感) 물가상승률이 고소득층보다 높게 나타나는 현장이다. 이는 통계 수치로도 확인된다. 11일 본지가 현대경제연구원에 의뢰해 소득계층별 체감 물가상승률을 계산해 본 결과,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3%대로 뛰기 시작한 작년 9월 이후 올해 3월까지 소득 하위 20%의 체감 물가상승률이 소득 상위 20%보다 0.46~0.91%포인트 높은 것으로 집계됐다. 소득계층별 체감 물가상승률은 통계청이 발표한 지출목적별 물가지수에 소득계층별로 지출 비중을 가중평균해서 산출했다. 만약 저소득층의 지출 비중이 높은 품목들의 가격이 많이 오르면 저소득층의 체감 물가상승률이 높게 나오는 것이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2년5개월 만의 최고치인 4.7%를 기록했던 지난 3월의 경우 소득 하위 20%의 체감 물가상승률은 4.91%, 상위 20%의 물가상승률은 4.45%로 저소득층이 0.46%포인트 높았다. 작년 10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4.1%를 기록했을 때는 소득 하위 20%가 체감하는 물가상승률은 4.7%, 소득 상위 20%는 3.8%로 차이가 0.9%포인트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식료품 등 생필품 가격이 크게 오른 탓

임희정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작년 하반기부터 저소득층의 소비 비중이 큰 식료품 등 생활필수품 가격이 크게 올랐지만, 고소득층의 소비 비중이 큰 교육비 상승률이 상대적으로 안정되면서 이 같은 차이가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작년 가계 지출 중 식료품의 소비 비중은 소득 하위 20%가 20.5%에 달했던 반면, 상위 20%는 11.4%에 불과했다.

그런데 지난달 배추 가격이 작년 같은 달보다 34%, 돼지고기는 31.7% 오르는 등 최근 식품 가격이 많이 오르자 자연히 저소득층의 체감 물가상승률이 높아진 것이다.

저소득층은 상대적으로 가격 상승률이 높은 등유를 난방에 이용하는 반면, 고소득층은 가격 상승률이 낮은 지역난방을 이용하는 것도 체감 물가의 차이를 내는 원인 중 하나다. 환경정책평가연구원에 따르면 월 소득 100만원 미만 가구 중 등유를 난방에 이용하는 가구 비중은 25%로 전체 평균(10.8%) 보다 2.5배 많다. 거꾸로 월 소득 600만원 이상 가구 중 지역난방 이용 가구 비중은 25.7%로 전체 평균(6.8%)의 3.7배나 됐다.

◆2008년 물가 상승기엔 고소득층의 체감 물가가 오히려 높아

저소득층이 물가 상승을 보다 민감하게 느끼다 보니 소비도 상대적으로 자제하는 모습이다. 지난 3월 한 달간 주로 고소득층이 애용하는 백화점의 경우 매출액이 작년 같은 달보다 12.1% 늘어났지만, 저소득층이 많이 이용하는 할인점 매출액은 2.1% 늘어나는 데 그쳤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교수는 "저소득층의 물가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는 저소득층에 한해 할인을 해주는 등 선별적인 가격 인하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모든 물가 상승기에 저소득층의 체감 물가상승률이 높은 건 아니었다. 현대경제연구원의 분석 결과 1997년 이후 4번의 물가 상승기가 있었는데, 그중 2008년 물가 상승기 때는 고소득층의 체감 물가상승률이 저소득층보다 높았다. 당시 생필품 가격 상승률은 6% 미만으로 지금보다 상대적으로 안정돼 있었으나, 교육비 상승률이 1년 내내 5%대에 달해 최근(2%대)보다 높았기 때문이라고 연구원은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