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암 걸리는 의사

1992년 예순세 살 오드리 헵번은 의사 충고를 무시하고 닷새 동안 케냐와 소말리아를 돌며 굶주린 아이들을 돌봤다. 그녀는 여행 중 심한 복통과 경련을 진통제로 눌러 가며 일정을 마쳤다. 제네바에 돌아온 뒤로도 그녀는 의사들의 검진을 거부하고 유니세프 일을 계속했다. 결국 고통을 참지 못한 그녀가 진찰을 받고 보니 대장암이었다. 의사들이 예언한 대로 그녀는 석 달 만인 이듬해 1월 세상을 떴다.

▶의사들은 꼭 필요한 진단도 거부하는 환자를 가장 싫어한다. 그러나 정작 의사 스스로 자기 몸에 나타난 질병의 초기 신호를 무시하며 병을 키우는 일이 적지 않다. 이런저런 증상을 별것 아니라고 무시하고 진단에 꼭 필요한 검사를 건너뛰어 적절한 치료 시기를 놓치기 쉽다. 자신의 의학 지식을 너무 믿는 데다 언제든 쉽게 치료받을 수 있다는 안이한 생각에 빠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환자 진료 경험을 많이 쌓은 전문의일수록 질병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른바 '전문의 증후군'이다. 이희대 강남세브란스병원 유방암센터장은 2003년 대장암 2기 진단을 받고 대장 일부를 잘라냈다. 반년 뒤 간과 뼈로 암이 전이돼 4기(말기) 진단을 받았다. 그 뒤로도 반년에 한 번씩 12차례나 암이 재발했지만 수술과 방사선 치료로 끝내 이겨냈다.

▶의사는 업무 강도와 스트레스가 높은 직업이다. 이름난 의사일수록 진료와 회진, 수술, 연구논문 쓰기, 의대 수업, 학회 활동으로 숨 가쁜 일상을 보낸다. 환자 살피느라 정작 자기 몸 돌볼 겨를은 없게 마련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술과 담배를 가까이하게 된다. 여러모로 암을 불러들이기 쉬운 조건을 갖춘 셈이다. 그래서 "의사가 시키는 대로 하되, 의사가 하는 것을 따라 해선 안 된다"는 얘기가 나온다.

▶지난 7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에서 검진받은 서울대 의대 교수 314명 중 3.18%, 10명에게서 암이 발견됐다고 한다. 1% 안팎인 일반인 암 진단율의 3배다. 결국 의사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스트레스인 모양이다. '암을 극복한 암 전문의' 이희대 박사는 "암환자의 고통을 아는 진정한 의사가 되는 길을 알려 주려고 암이 찾아온 게 아닌가 싶다"고 했다. "환자와 의사 사이 신뢰가 중요하다는 것도 새삼 확인했다"고 했다. 그에겐 암이 의사로서 한 걸음 더 올라서는 계기가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