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의 모델인 탈북자 친구, 내가 가장 잘 알아 직접 연기"

'무산일기'는 제작비 8000만원이 든 저예산영화이다. 그러나 올해 도빌 아시아영화제 심사위원상과 로테르담영화제 대상을 받는 등 거둔 성과는 만만치 않다. 감독이자 주연배우인 박정범(35)은 달변이었다. 그가 연기한 영화 속 주인공 승철이 뭔가 말하고 싶은 눈빛을 내보이면서도 끝끝내 목구멍으로 말을 밀어 넣는 것과는 딴판이었다. 박 감독은 연세대 체육교육과를 나와 이창동 감독 밑에서 조연출을 했다. 무산일기가 첫 장편 연출작이다.

무산일기는 한 탈북자의 남한 사회 적응기를 사실적이면서도 담담하게 그려냈다. 탈북자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기 어려운 승철은 벽보를 붙이는 일을 한다. 그의 유일한 낙(樂)은 일요일마다 같은 교회에 다니는 숙영을 보는 것이다. 승철의 유일한 친구였던 경철은 탈북자 브로커 일이 잘못돼 도망자 신세가 된다. 최근 박 감독과 영화를 함께 봤다.

―승철은 왜 촌스러운 단발머리를 하고 다니나.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겉도는 승철과 어울리는 머리 스타일이다. 또 돈을 아끼려고 이발소를 안 가고 머리를 기른다는 설정도 있었다."

―왜 주인공을 직접 연기했나.

"승철의 모델이 된 친구는 나를 형이라 부르며 따르던 탈북자다. 3년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친구의 말투, 눈빛, 행동을 담고 싶었는데 그걸 나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다."

―승철도 그렇고 다른 배역들도 다 정말 리얼하다.

"탈북자들을 돌보는 형사 역할은 내 아버지께 부탁했다. 형사를 온화하고 탈북자들을 도와주려는 캐릭터로 그리고 싶었는데 딱 아버지 이미지였다. 촬영 때 아버지는 아들한테 말하듯 대사를 했고 대사를 까먹으면 애드립을 했다. NG 한 번도 안 냈다."

―영화에 무산은 한 번도 안 나오던데.

"실제로 함경북도에 있는 지명이고 주변에 있는 탈북자 중 이곳 출신이 많다. 무산은 무성할 '무(茂)'에 뫼 '산(山)', 즉 무성한 산이란 것이다. 그런데 사진을 찾아보니 무산이 민둥산이다. 풍족한 삶을 꿈꾸며 남한에 오지만 비루하게 살 수밖에 없는 탈북자들의 현실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엔딩이 참 길다.(노래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승철이 잠시 가게에 다녀오는 동안 그가 애지중지 기르던 개가 차에 치여 죽는다. 승철은 개를 한참 쳐다보다가 가버린다)

"그 장면을 촬영할 때 죽은 친구가 살아온 삶이 생각났다. 그래서 예정했던 시간보다 더 길어졌다."

―엔딩이 불편하다는 관객은 없었나.

"원래 세 개의 엔딩을 생각해놨다. 죽은 개를 지켜보는 것과 두고 가는 것, 갖고 가는 것이다. 죽은 개를 두고 가는 엔딩을 택한 것은 승철이 자신의 양심과 자존심, 죄책감을 버렸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죽은 개를 계속 지켜보는 엔딩이었다면 관객은 희망을 가졌을 거다. 관객을 배신한 것 같다." 14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