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 길로 새는 주택담보대출… 가계 부채 위험 모락모락

개인사업을 하는 정모(40)씨는 최근 시중은행에서 본인 이름으로 된 집을 담보로 2억5000만원을 대출받았다. 이번에 새로 시작하는 사업에 드는 개업비용 1억5000만원과 사무실 증축비용 1억원을 충당하기 위해서였다.

대출 상담을 받은 정씨는 기업 대출을 이용하는 것보다는 주택담보 대출로 돈을 빌리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 기업 대출은 대출기간이 길어야 3년인 반면 주택담보 대출은 거치기간을 30년까지 연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출금리가 0.23%포인트 더 낮고, 대출금의 0.5% 정도 되는 근저당설정비를 은행이 대신 부담해 준다는 점도 주택담보 대출을 택한 배경이 됐다.

자동차 부품을 조립하는 중소기업에 다니는 이모(48)씨도 주택담보 대출을 통해 1억5000만원을 빌렸다. 올 들어 국제 원자재가격 상승으로 다니던 직장이 직격탄을 맞았기 때문이다. 자금 조달에 차질이 생기면서 회사 경영진이 부장급 이상 직원들에게 개인 대출을 통해서라도 회사 운영자금을 마련해달라고 읍소했다. 이씨는 살고 있는 아파트를 담보로 비교적 손쉽게 대출을 받았지만 회사 상황이 얼마나 빨리 개선될지 불안한 마음이다.

대학생 자녀를 둔 주부 고모(52)씨는 생활비를 위해 주택담보 대출을 받은 경우다. 당장 자녀의 대학 학자금이 없어 집을 담보로 3000만원을 대출했다. 자녀 이름으로 학자금 대출을 받기는 왠지 찜찜해 본인의 이름으로 대출을 받은 것이다.

주택담보 대출이 '다용도' 대출로 사용되고 있다. 집을 새로 사거나 넓은 평수로 옮기는 실수요 목적이 아니라 사업자금이나 생활비 마련을 위해 주택담보 대출을 받아가는 대출자들이 늘고 있다.

주택담보 대출금리가 다른 대출금리에 비해 낮고 주택을 담보로 할 경우 은행의 대출 문턱이 낮아지는 점이 가장 큰 이유다. 최근 은행들이 몸집을 불리기 위해 주택담보 대출에 적극적인 점도 한몫했다. 은행들의 주택담보 대출 규모는 매달 늘어 2월 현재 288조원에 달한다.

19일 금융당국에 따르면 은행권의 주택담보 대출 신규 취급액 중에서 주택 구매가 아닌 다른 용도로 사용된 비율은 지난 2009년 말 29.2%를 기록한 뒤 계속 증가해 지난해 8월에는 절반에 가까운 48%까지 치솟았다. 올 2월 현재 35.7%까지 하락했지만 다시 오를 가능성이 크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주택담보 대출을 주택 구입 외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비율은 계절적으로 연초에 낮은 반면 6~8월에는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실제로 주택 구매 외 용도로 주택담보 대출을 받는 대출자들이 알려진 것보다 더 많을 것으로 본다. 물론 주택담보 대출을 받아 꼭 집 늘리는 용도로만 사용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하지만 부동산시장이 침체된 데다 이미 가계가 떠안은 부채가 막대한 점을 비춰보면 자칫 가계 부채대란을 부채질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집값이 오를 때 무리하게 집을 산 뒤 빚 상환 부담 때문에 허덕이는 이른바 '하우스푸어(house poor)'들이 재대출받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박덕배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주택담보 대출을 받는 절반 정도가 사업자금이나 생계비용, 자녀 학자금 등에 쓰고 있을 것"이라며 "가계의 자산은 제자리이고 부채만 늘어가는 상황에서 집값이 내리고 주택 거래마저 실종되면 가계의 유동성 위기가 상당한 사회문제로 번질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