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로 번 돈, 사회과학 요람 키워내다

1970년대 제화업계를 양분했던 구두 업체 에스콰이아의 회장 이인표(1922~2002). 나이 50에 과로로 쓰러지면서 인생을 되돌아보게 됐다. "가치 있는 일을 해놓고 세상을 떠나야겠다." 사회과학계가 문헌 부족으로 연구에 어려움이 많다는 얘기를 들은 그는 1981년 이인표 재단(현 한국사회과학자료원재단)을 만들었다. 출자금 400억원. 당시로써는 입이 벌어질 액수였다. 직접 초대 이사장을 맡아 2년 준비 끝에 도서관을 열었다. "여기서 공부한 인재들이 나중에 국가에 봉사한다면 그만큼 국가에 유익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구두업자'로 옥관문화훈장까지 받은 그가 남긴 한국사회과학자료원(KOSSDA)이 올해 재단 설립 30주년을 맞았다.

석현호(70) 이사장은 "국내 사회과학 연구자들치고 이곳 안 거쳐 간 사람 드물 것"이라 단언했다. 실제로 국내외 학자들은 서울 종로구 사직동 언덕 위의 이곳을 '한국 사회과학 연구의 요람'이라 부르길 주저하지 않는다. 석 이사장은 "이인표 회장께서는 처음부터 세계적으로도 손색이 없는 사회과학 문헌정보센터를 겨냥했다"며 "외국 같으면 정부나 대학이 할 일이었다"고 했다.

이 도서관은 사회과학도와 교수들 사이에선 '오아시스'였다. 자료와 참고 문헌에 주려 있었던 이들은 이곳에서 지적 허기를 해결했다. "과거 이념적 연구에서 점차 경험적 연구가 강조되면서 자료 수요는 늘어만 갔지요." 석 이사장은 재단 설립 때 자문위원으로 참여해 96년부터 이사장을 맡고 있다.

도서관은 대표적인 사회과학 분야 학회의 둥지이기도 했다. 정치학회 사무실이 이곳에 있다가 독립해 나갔고 사회학회와 사회과학협의회는 지금도 있다. 1987년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소가 이곳 자료를 토대로 우리 사회 중산층을 조명하는 논문을 발표, 6월 항쟁을 예고한 것은 유명하다. 서울대 사회학과 이재열 교수는 "우리 사회의 변화를 연구하기 위한 경험 자료에 관한 한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보고(寶庫)"라면서 "요즘 이슈인 공정성과 형평 문제만 해도 1990년대 초반부터 연구돼 온 자료가 축적돼 있어 누구나 활용할 수 있다"고 했다.

도서관은 2006년 지금의 한국사회과학자료원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대학 도서관이 성장하면서 기능이나 서비스 중복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자료원 DB에는 각종 조사·통계자료와 기록문서, 관찰기록, 면접 및 구술 자료, 전자저널, 박사학위 논문, 정부 산하 연구기관 연구보고서, 국내외 출판 연구단행본 등이 망라돼 있다. 일반인도 홈페이지(http://kossda.or.kr)를 통해 이용할 수 있다.

오는 22일 재단 설립 30주년을 맞아 학계 인사들과 기념식을 갖는다. 석 이사장은 그래도 갈 길이 멀다고 했다. "아직도 조사연구 네트워크의 확장과 소장 자료의 국제화 등 할 일이 많습니다. 국내 사회과학 연구의 대표적인 인프라라는 사명감을 갖고 꾸준히 노력할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