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 내 인생] 봉제공장 사장서 컴퓨터 강사 된 신희덕(72)씨

"할아버지, 파일이 안 열려요. 이거 연동 프로그램이 뭐예요? 뭐가 잘못된 거예요?"

오늘도 손자놈이 목청이 터져라 나를 불러댄다. 고장 난 노트북을 들고 제 아비 어미를 거쳤다가 해결이 안 되자 나에게 SOS를 친다. 요 녀석, 동네 친구들에게 내 자랑이 대단하다. "우리 할아버지 말이야. 컴퓨터 도사야. 모르는 게 하나도 없어."

올해 일흔둘의 나는 컴퓨터 강사다. 나이 많다고 거저 직함을 붙여준 '무늬만 강사'가 아니다. 국제공인 IT자격증인 ICDL 자격증, 국가공인 정보기술자격시험인 ITQ 강사 자격증 등 IT 관련 자격증을 17개나 보유한 엄연한 컴퓨터 전문가다. 어린 아이나 청소년부터 내 또래 노인에게까지 두루 컴퓨터를 가르친다. 지금은 컴퓨터 '빠꼼이'지만 한때는 컴퓨터 전원 켜는 법도 모르는 컴맹이었다.

컴퓨터와 인연을 맺기 전, 내 인생 1막은 방황의 연속이었다. 1960년대 중반 대학을 졸업하고 조그마한 언론사에서 잠시 일하다 봉제공장을 열었다. 당시 섬유 쪽이 워낙 활황이라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해외로 수출도 많이 하고 '사장님' 소리 듣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영화(榮華)는 오래가지 못했다. 1970년대 초반 오일쇼크가 터지면서 자금난을 감당할 수 없었다. 매사 남에게 손 내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가만 있다가 부도를 내고 말았다. 결국 회사문을 닫았고 그때부터 고생길이 시작됐다. 중국집, 생필품 장사, 옷 장사…. 닥치는 대로 다 했지만 수중에 돈은 들어오지 않았다. 무엇을 해도 "이건 내 길이 아니다"란 생각 때문에 몰입할 수가 없었다.

이 일 저 일 전전하다가 1990년 뜻 맞는 이들과 함께 대한무도회(大韓武道會)를 창립해 수석부회장으로 활동했다. 어렸을 때부터 무술과 격투기를 해왔기에 사업을 하면서도 언젠가 이 분야의 발전을 위해 일해야겠다고 다짐했던 터였다. 사명감까지 더해져 즐겁게 일했지만 재정난에 허덕이다 창립 5년 만에 단체를 해산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1996년 정신적 버팀목이었던 어머니가 세상을 뜨셨다. 온갖 회한이 한꺼번에 물밀듯 밀려들어 왔다. 못난 아들 때문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 같아 자책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얼마 뒤 마음의 병이 몸의 병으로 전이됐다. 직장암 선고를 받은 것이다. 병원에선 당장 수술하자고 했지만 거부했다. 무예인으로 건강 하나는 누구보다 자신 있었던 내가 병마와 싸워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1년 반쯤 지났을까 갑자기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결국 응급실에 실려가 암 수술을 했다. 의사는 기껏해야 닷새 정도 살 수 있다고 했지만 명줄은 생각보다 길었다. 항암 치료 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워 스스로 삶을 마감하려 한 적도 있었지만 생(生)은 위태하게 이어졌다.

1999년 암과의 지겨운 싸움을 이어가던 어느 날 우연히 컴퓨터 광고를 보다가 뜬금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무술로 갈고 닦은 심신수련법을 인터넷으로 알리는 사이버 도장을 열어볼까. 동작은 몸이 아파서 하기 힘드니까 그래픽으로 대신하고….' 때마침 서울시민대학에서 PC강좌 수강생 모집을 공지해 일단 지원부터 하고 봤다. 컴퓨터를 배우는 재미에 쏙 빠져 육체의 아픔은 잊어버렸다. 내친김에 자격증도 땄고 2002년엔 전국 실버 정보검색 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그해 운 좋게 국민정보화 교육 강사로 뽑혀 본격적으로 컴퓨터 강사 일을 시작했다. 60년 동안 찾아 헤맸던 내 적성을 그제야 알아낸 느낌이었다. 컴퓨터에 정신 팔려 있는 사이 암은 어느새 자취를 감춰버렸다.

'할아버지 강사'로서 해프닝도 많다. 강의하러 가면 주차관리원인 줄 알고 열쇠를 주는 사람도 있고, 손자를 데려다 주러 왔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얼마 전엔 일산의 한 노인종합복지관에 갔다가 근 50년 만에 어릴 적 친구를 만났다. 친구가 대뜸 "나 여기 컴퓨터 배우러 왔어" 하고 의기양양하게 말하는데 차마 그 앞에서 "내가 네 선생이다"라고 말할 수 없었다.

요즘 나는 노인 인권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컴퓨터를 가르치면서 한국 노인들의 딱한 현실을 보고 내가 나서서 조금이라도 바꿔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내 또래 노인들에게 입이 닳도록 말한다. 자식에게 짐이 되고 식량만 축내는 '뒷방 늙은이'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한다고. 내 자신이 바로 살아 있는 케이스 아닌가. 오늘도 나는 뒷방에 박혀 사는 노인들이 세상으로 박차고 나오게 하기 위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