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거장 이브와 연인 피에르… 연기보다 더 심오한 다큐의 힘!

소매가 넓은 옷을 입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옷은 완연한 표정을 갖는 일상(日常)이며 인류의 오래된 문명이다. 나는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 옆에 있으면 즐겁다. 옷의 아름다움은 사회의 공유재산이다.

서울 도심의 작은 영화관에서 '이브 생 로랑의 라무르'(감독 피에르 소레톤·2010년작)를 관람했다. 영화는 20세기 패션의 거장 이브 생 로랑의 일대기를 그의 연인이며 예술과 사업의 동반자인 피에르 베르제가 회고하는 형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피에르는 이브보다 여섯 살 위 남자이다. 지어낸 이야기가 없고 배우들의 의도된 연기가 없어서 이 영화는 정직하게 쓰인 에세이로 읽힌다. 영화 전체 구도의 편안함은 서술자인 피에르 베르제의 삶의 진정성 위에 실려 있다. 그의 진정성은 재능의 업적과 명예와 재물을 모두 세상으로 돌려보내는 최후의 빈손에 있다.

나무는 본래 스스로 그러한 자연성만으로도 위대하다. 그 스스로 그러함이 인간의 일상 속에서 살아 피어날 때 나무는 더욱 소중하다. 아름다움과 일상이 제가끔 따로따로라면 그 양쪽이 모두 공허하거나 서로에게 무의미할 것이다. 옷은 환영(幻影)으로서의 아름다움을 일상의 생필품으로 만들어서 인간의 몸에 걸치게 해준다. 그래서 옷은 환영인 동시에 일상이다. 책은 몸에 걸치지 못하지만, 옷은 환영을 천으로 재단해서 사람의 몸에 걸치는 것이다. 그래서 옷은 모든 예술 장르 중에서 가장 생활적이고 가장 육체적이다. 몸에 닿아서 작동된다는 점에서 옷은 악기와 같다. 저마다 다른 음색과 음역과 주법을 갖는, 끝없이 많은 미래의 악기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이 영화는 환영으로서의 아름다움을 인간의 몸에 걸치는 옷으로 만들어내는 예술가의 열정과 헌신, 그리고 고통과 좌절을 이브와 피에르 두 사람의 인간관계를 통해 전개해나간다.

영화 속에서 이브와 피에르는 아무 연기를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각각 완성된 인격의 질감으로 화면을 채운다. 이브는 예술적 열정과 고통을 깊은 곳에 숨긴 인간의 따스함, 가벼움, 유머, 친절 그리고 때때로의 고통을 그의 행동과 말로 보여준다. 그가 "길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갖고 싶다" 또는 "넓은 침대에서 삶을 마치고 싶다"고 말할 때, 그의 표정은 따스하고, 삶의 하중을 가벼운 놀이로 바꿔준다. 그 가벼움에 대한 동경은 대중의 갈채 속에 파묻힌 자의 고통을 전해주고 있다.

이브는 카뮈의 고향인 알제리 오랑에서 태어나 18세 때 스승인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조수가 되고 23세 때 스승이 세상을 떠나자 그 후계자가 되어 회사를 인수했다. 그 사제(師弟)지간과 피에르 베르제의 만남이 아마도 운명일 것인데, 운명은 서로를 알아보는 자들 사이에서만 운명적이다.

영화는 거장의 생애를 강도 높게 압축한다. 은퇴를 발표하는 늙은 이브는 연기보다 더 심오한 다큐의 힘을 보여준다. 이브와 피에르가 누리던 모든 부동산과 소장품들은 이브 사후에 경매되어 낙찰액 6000억원 전체가 에이즈퇴치기금으로 사회에 환원되었다. 경매처분을 보여주는 화면은 신속하고 경쾌하다. 돈은 콸콸 흘러간다. 재물이 그것을 이룩한 자의 소유를 떠나 재물 스스로의 정당한 갈 길을 찾아가는 모습은 저토록 가볍다. 영화가 이브와 피에르의 인간관계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이브의 작업 내용과 세속적 명성에 치인 그의 고뇌가 정밀하게 드러나지 않는 점이 욕심 많은 한 관객의 아쉬움이다. 21일 개봉. 전체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