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협, 위기관리 5대 원칙 거꾸로 갔다

"오늘 안으로 다 복구됩니다."(14일)→"22일까지 복구하겠습니다."(18일)→"약속 못 지켜서 죄송합니다. 이달 말까지 복구하겠습니다."(22일)

사상 초유의 전산망 마비사태를 겪고 있는 농협의 위기 대응능력이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당초 하루 이틀이면 해결할 수 있다고 큰소리쳤지만 사고 발생 2주가 다 되도록 완전 복구가 요원하다. 최고경영자(최원병 회장)가 "나는 책임이 없다"는 발언을 하면서 자중지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농협이 위기관리 원칙을 준수했는지 살펴봤더니 5가지 중 1가지만 준수했을 뿐 4가지는 원칙에 어긋났던 것으로 드러났다.

①24시간 안에 입을 열어라: 합격

농협의 초기 대응은 비교적 신속했다. 전산망을 관리하는 외주업체(한국IBM) 직원의 노트북컴퓨터에서 '시스템 완전 삭제 명령'이 실행된 것은 지난 12일 오후 4시 56분이었다. 5분 후 전산망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감지했고, 5시 10분쯤 모든 전산망 가동을 중단시켰다. 사고가 발생했고 복구를 시작했다는 것도 6시쯤부터 외부에 알리기 시작했다. 위기관리학에서 사고가 생긴 후 외부에 공개하는 시각을 뜻하는 '골든 타임'을 발생 후 24시간으로 잡는 것을 감안하면 농협이 사고 사실을 빨리 공개했다는 점은 평가할 만하다.

②있는 그대로를 알려주라: 불합격

농협은 사고 발생 바로 뒷날인 13일부터 유실된 신용카드 거래내역을 수작업으로 복구하고 있었다. 인터넷상에서 신용카드를 거래한 경우에는 기록이 전산에만 남기 때문에 영구 유실될 가능성을 이때부터 염두에 두고 움직인 것이다. 하지만 농협은 "유실된 데이터는 100% 찾을 수 있다(18일 기자회견)"고 큰소리치다가 결국 사고 발생 11일 만에 "완전히 복구하지 못할 수도 있다"며 말을 바꿨다.

한마디로 '투명성의 역설'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문제점이 고스란히 드러나면 손해볼 것 같지만 실제로는 투명해야만 이득을 본다는 원리다. 별것 아닌 것처럼 말했다가 결과가 부합하지 않으면 신뢰만 잃게 된다는 것이다. 최철규 세계경영연구원(IGM) 부원장은 "최악의 경우 복구에 몇 주가 걸릴 수 있고 일부 데이터는 영구 삭제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솔직히 알렸으면 비난을 덜 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③CEO, 전략적으로 활용하라: 불합격

금융권 인사들은 이번 전산망 마비사태를 두고 CEO(최고경영자)인 최원병 회장의 언행이 가장 아쉽다고 입을 모은다. 위기 때엔 내부의 역량을 결집하는 리더십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러나 최 회장은 "나는 비상근이라 일을 모르고 책임도 없다"고 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부하 직원들을 공개 질책해 사기를 꺾었다.

그는 지난 14일 기자회견장에서 사내 IT 담당자들에게 "속이지 말고 확실하게 하라"며 호통을 쳤다. 어쩔 수 없이 발생한 사고라도 우리 회사 임직원들은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선량한 사람들이라는 인식을 CEO가 분명하게 심어줘야 한다.

④위기관리팀을 구축하라: 불합격

어떤 기업이든 돌발적인 위기가 발생했을 때를 대비한 위기관리팀이 사전에 구성되어 있어야 한다. 위기가 터지면 '섀도캐비닛(shadow cabinet)'처럼 누가 팀장을 맡고 누가 대변인을 맡는다는 식의 '가상의 팀'이 있어야 하고, 사고가 발생하면 해당 팀이 즉각 활동을 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농협은 위기 상황을 대비하는 사전 시스템이 전혀 갖춰져 있지 않았다. 사고가 터진 이후에도 이를 수습하기 위한 별도의 팀이 가동되지 않았다.

⑤입을 단일화하고 내부를 통제하라: 불합격

위기관리팀이 따로 없다 보니 농협의 입장을 밝히는 '입'도 통일되지 않았다. 복구 가능시점과 사고 원인을 두고 여기저기서 각기 다른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기자회견장에서 금융거래원장이 훼손됐는지 여부를 두고 어떤 관계자는 "원장이 훼손됐다"고 말하고 다른 관계자는 "원장이 훼손되지 않았다"고 말해 취재진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위기에 입을 단일화시키지 않으면 통제 불능사태가 되면서 확인되지 않은 설익은 메시지들이 들불처럼 번진다는 점에서 아쉬웠던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