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인문학] 소년 서정주 뛰놀던 앞마당엔 꽃비가 날리고

시인을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라더니, 이날 전북 고창 미당 서정주(1915~2000) 생가에는 꽃비와 함께 바람이 휘날렸다. 아담하고 단정한 초가(草家). '소년 서정주'가 천방지축 뛰놀았던 앞마당에서 시인의 시편 '마당'을 떠올린다. '해가 지면 이 마당에 멍석을 깔고/ 온식구가 모여앉아 칼국수를 먹었네/ 먹고선 거기 누워 하늘의 별 보았네/ 희한한 하늘의 별 희한스레 보았네'('마당' 부분)

조선일보·국립중앙도서관·교보문고가 주최하고 한국도서관협회·대산문화재단·문학사랑이 후원하는 '길 위의 인문학' 4월 두 번째 탐방이 '실학과 미당의 시심을 찾아서'를 주제로 22~23일 전북 고창 일대에서 열렸다.

당일 여정이었던 이전 행사와 달리, 올해 들어 첫 1박2일. 아침 7시 30분 출발에 비까지 내리는 녹록지 않은 일정이었지만, 60여명의 탐방단은 인문학적 낙천주의자를 자처했다. 새벽에 일어나는 사람만이 새벽을 만날 수 있고, 봄비 내린 뒤의 들판이 더 아름다운 법. '박학다식의 대명사'인 조선후기 실학자 황윤석, 그리고 '시의 정부(政府)'로 불렸던 서정주의 고향 고창은 그렇게 이 자발적 낙천주의자들을 맞았다.

1박2일의 여정은 넉넉한 듯 촘촘하다. '반계수록'을 썼던 유형원(1622~1673)의 유적지를 오전에 들른 데 이어, 오후에는 이재 황윤석(1729~1791)의 생가를 찾는다. 대부분의 후세에게는 낯선 이름. 조선시대 유학을 전공한 한국전통문화학교 최영성 교수가 달변으로 이 박학다식한 실학자를 소개한다. 황윤석은 빌 브라이슨의 책 제목을 빌려 표현하면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꿰뚫고 있던 인물. 열살 때부터 57년간 50여권의 독서일기를 썼고, 역법·수리·천문·기하 등 자연과학에도 능통했던 학자다. 당시 조정에서도 "모르는 것이 있으면 고창의 이재를 찾아가라"했을 만큼, 백과사전적 지식을 자랑했다. 최 교수는 "경세치용의 이념에 투철했던 유형원과 달리, 황윤석은 박물학적 지식에만 머물렀던 아쉬움이 있다"고 했지만, 개인의 세계관에 따라서는 오히려 그게 매력이기도 하다.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신념가들이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 많은데, 몇몇만큼은 자신만의 지적 만족과 즐거움을 위해서 책을 읽고 글을 써도 좋지 않을까.

20분 거리에 떨어진 미당 서정주의 시문학관과 생가는 시인 문태준이 안내한다. '미당(未堂)'은 아직 덜된 사람이라는 의미. 영원히 소년이고자 했던 시인의 호를 새기며, '소년 서정주'를 그렇게 예뻐했다는 시인 외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는다. 밤마다 어린 시인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줬다는. 외할머니 집 뒤꼍 툇마루에 숨으면, 그 매서웠던 어머니의 꾸지람도 결코 미치지 못했다는 시인의 성(城).

생가 바로 옆에는 시인의 친동생인 서정태(88)옹이 홀로 사는 초가가 있다. 형님의 생가와 거의 똑같이 지은 아담한 초가. 문태준 시인과 잠깐 들러 인사를 올린다. 정정한 모습으로 객을 맞는데 "형님보다 내가 여덟살 아래니, 내가 세 살을 더 살았다"고 웃으며 "5월 초에 뒷산 산벚이 무척 좋으니 한 번 더 들르라"고 초대한다. 독서로만은 결코 완성할 수 없는, 현장의 목소리, 체험의 공간들이다.

2000년 크리스마스 전날, 흰 눈이 세상을 하얗게 덮었고 미당은 하늘로 떠났다. 마침 문학담당이었던 기자는 산길 질마재로 오르는 상여를 현장에서 지켜봤다. 11년이 지난 4월 하순, 질마재로 오르는 산길에는 머위가 지천이다. 선홍색 등산재킷을 입고 날렵하게 등산화끈을 동여맨 일행 중 한 명이 둔덕의 머위를 뜯는다. 동네 쌈밥집 머위보다 씨알은 작지만, 더 푸르고 더 싱싱한 잎. 오늘 저녁 시간에 나눠 먹을 작정이란다. 어쩌면 진정한 '길 위의 인문학'은 이 푸른 잎에 있을지도. 질마재 하늘 위에서 시인이 우리들을 사랑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