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과 '설마리의 영웅들' 60년 만에 부둥켜안다

"60년 전에 전 열한 살짜리 꼬마였어요. 여기서 10㎞ 떨어진 임시 포로수용소에서 여러분이 '물 한 모금만 달라'면서 제게 손짓했었는데, 기억나십니까?"

지난 23일 오전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 영국군 전투전적비 앞에서 이창모(71)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백발이 성성한 머리에 검은색 베레모를 쓴 영국군 노병(老兵) 8명이 이씨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들은 1951년 4월 중공군의 공세에 맞서 혈전을 벌인 영국군 29여단 글로스터셔 연대 제1대대 참전 용사들이다. 당시 상병으로 참전했던 해리 혹스워스(81)가 기억을 더듬다 눈을 크게 떴다.

"맞아요. 기억납니다. 이 근처 마을 포로수용소에서 잠시 머물렀었는데. 그때 저희를 봤습니까?"

이씨가 "껴안아도 되겠느냐"고 묻자, 혹스워스가 그를 와락 껴안았다. 중공군 포로가 됐던 영국군 참전용사와, 이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이씨가 60년 만에 만난 것이다. 29여단 글로스터셔 연대 1대대 영국군 652명은 임진강을 앞에 두고 감악산을 뒤로 한 이 요충지에서 중공군 4만2000명에 맞서 나흘간 버티다가 대부분 포로가 됐다. 영국군에서는 6·25 참전이라고 하면 설마리를 떠올릴 정도로 기억되고 있다.

서울을 향하는 길목을 지켜내 서울 함락을 저지하고 중공군의 인해(人海)전술을 지연시킨 이 전투는 국방부가 1975년부터 매년 이맘때면 기념식을 가질 정도로 6·25 전쟁의 중요한 고비 중의 하나였다. 올해 '임진강전투 60주년 기념행사'에 생존해 있는 영국군 노병들을 초청했다.

이씨는 이들 노병들에게 지난해 10월 국방부에 영국군 유해가 묻힌 장소를 제보, 발굴될 수 있도록 했다는 얘기를 조심스레 꺼냈다. "저는 포로수용소에서 20~30m 거리에 살았어요. 당시 다리에 총상을 입은 영국군이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수용된 지 일주일 만에 죽었어요. 저의 부친과 친지 세 분이 카키색 영국 군복을 입은 시신을 묻었습니다." 이씨의 얘기를 듣던 노병들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앨버트 베넷(82)은 "중공군 수만 명이 잠복했다가 갑자기 튀어나와 총알 세례를 퍼붓는 상황에서 내 목숨 하나 지키기에 급급했다. 전우의 유해를 찾아줬다니 정말 감사하다"며 이씨의 두 손을 꼭 잡았다.

브래드쇼(81)는 "2년4개월 동안 중공군 포로로 수용되면서 300명이 넘는 전우가 사망했는데 누가 죽었는지, 다른 전우의 유족들은 어떻게 사는지 까맣게 잊고 지냈다"며 "유해의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있으면 유족부터 찾을 수 있게 돕겠다"고 했다. 이씨는 "60년간 묵은 한(恨)이 풀렸다. 그동안 짊어지고 있던 짐을 내려놓은 것 같다"고 말했다. 영국 보훈처는 '설마리 영웅'의 유해를 본국으로 송환해 유가족을 찾을지, 부산 UN묘지에 안장할지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일보 DMZ 특별취재팀은 이번 유해 발굴부터 감식에 이르는 전 과정을 단독 취재했으며 영국 BBC 방송과 6·25 전사자 유해발굴 특집 다큐멘터리를 공동 제작해 조선일보 종편채널 개국 프로그램으로 방영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