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와 근대 일본 화가, 서로 '베낀' 사이?

휘영청 보름달이 밝았다. 번화한 상점가를 걸어가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달빛 아래 또렷하다. 죽 뻗은 거리는 화면에서 멀어질수록 좁아져 소실점을 이룬다. 그림자는 서양의 명암법, 소실점은 선원근법을 적용한 이 그림은 일본 에도 시대 화가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廣重·1797~1858)의 우키요에(浮世繪·다색목판화) '사루와카 거리의 밤 풍경'(1856)이다.

네덜란드 화가 반 고흐(van Go gh·1853~1890)의 그림 '밤의 카페 테라스'(1888)는 이 그림과 소재·구도가 비슷하다. 학자들은 우키요에에 심취했던 반 고흐가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작품을 참고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런데 우타가와 히로시게는 당시 일본에서 인기있던 네덜란드 그림의 화법을 참고해 '사루와카 거리의 밤 풍경'을 완성했다. 네덜란드 그림을 보고 일본인 화가가 그림을 그리고, 이에 영향을 받아 또다시 네덜란드 화가가 그림을 그린 것. 오리엔탈리즘의 주체와 객체 사이의 상호 조응인 셈이다.

20일 서울대 미술관에서 개막한 '근대 일본이 본 서양'전에는 18~19세기 에도막부 시대의 화가들의 서양화 기법 수용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 80점이 소개된다. 모두 일본 고베(神戶) 시립미술관 소장품이다.

1854년 미·일 화친조약 전까지 쇄국 정책을 고수한 에도 막부는 나가사키(長崎)만 열어둔 채 중국·네덜란드와 제한적으로 교역했다. 그러나 화가들의 호기심은 국경을 넘었다. 중국과 네덜란드에서 흘러들어온 그림들은 화가들에게 큰 자극이 됐다. 그림 솜씨가 뛰어났던 아키타번(秋田藩)의 무사 오다노 나오타케(小田野直武·1749~1780)는 에도에서 서양화법을 배워와 아키타에 전파했다. 일본 최초의 서양화풍 '아키타란가(秋田蘭?)'의 탄생 배경이다.

이번 전시에 나온 오다노 나오타케의 '연꽃'은 서양화의 명암법을 이용해 물에 비친 연꽃의 그림자까지 은근하게 그렸다. 내달 29일까지. (02) 880-9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