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방곡곡 'Walk & Work'] 도예가 이윤신과 가회동 북촌로

도예가 이윤신(53)씨는 틈만 나면 걷는다. 그것도 민얼굴로. 가능한 태양을 피하려 이슬람 여인의 '히잡' 수준으로 얼굴을 가리는 뭇 한국여성들과 다르다. 그는 "햇빛을 가능한 한 많이 쬐려 한다"고 했다. "광합성을 해야 비타민이 생성된다잖아요. 피부가 타는 것, 별 거부감 없어요. 어렸을 때는 태닝하는 것도 좋아했어요. 햇빛뿐 아니라 바람과 숲도 시간 날 때마다 '쬐려고' 노력해요."

그런 이씨에게 자신의 사무실 겸 전시관인 '이도 갤러리'(02-741-0724, yido.kr)가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 있는 건 참 다행한 일이다. 사무실을 나가기만 하면 걷기 좋은 길이 사방으로 뻗어 있다. 그가 가장 즐겨 걷는 코스는 북촌로를 따라 북쪽으로 와룡공원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이씨를 만난 지난 25일은 봄 햇살이 화창했다. 그와 함께 사무실을 나왔다. 사무실이 있는 북촌로를 따라 언덕을 300m쯤 오르다 왼쪽으로 구부러지는 길을 따라 걸었다. 조금 가니 감사원 건물이 나왔다.

이씨는 대학에서 공부하고 이른바 '생활도자기'를 만드는 도예가 1세대로 꼽힌다. 그가 도예를 '예술품'이 아닌 '그릇'으로 인식하게 된 계기는 일본 유학이었다. "일본에 가보니 좋은 그릇을 식탁에서 사용하는 거예요. 사서 쓰지는 않고 감상만 하는 우리와는 크게 달랐죠."

이씨는 자신의 도예 작품의 출발점은 실용성이라고 했다. "보통 도예가들은 '어떤 형태를 창조할 것인가' 즉 조형에서 출발하죠. 저는 '어떻게 사용하는가' 즉 용도에서 출발해요. 샘플을 만들어서 직접 사용해봐요. 김치를 담아보죠. 그러면 빨간 물이 배지는 않는지, 잘 쌓을 수 있는지 알 수 있어요. 그릇이란 오로지 음식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씨는 도자기가 실용적이려면 시대를 반영해야 한다고 믿는다. "고려청자 조선백자 물론 훌륭하지만, 그대로 재현하는 건 재미 없죠. 전통의 정신을 지속 발전시켜야죠. 손때가 남아 있는 곳에서 시작해야죠. 그래서 강북, 가회동이 좋아요. 강남은 스쳐 지나갈 뿐인 동네잖아요."

이씨를 따라 걷는 가회동 북촌로에는 한옥은 물론 1950년대부터 최근까지 지어진 근대 건물이 뒤섞여 있다. 똑같은 모양의 아파트가 줄지어 선 강남과는 다른 리듬감을 자아낸다. 감사원 앞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1㎞쯤 걷자 왼쪽에 2차선 도로가 나왔다. 서울에서 가장 벚꽃이 화려한 것으로 손꼽히는 길이다. 바람이 불자 연분홍빛 벚꽃잎들이 봄비처럼 내렸다. 뒤로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도로 옆으로 조성된 산책로를 1㎞ 채 걸어 오르지 않아 서울성곽이 있고, 그 아래 와룡공원이 보였다. 사무실에서 와룡공원까지는 2㎞도 안되는 짧은 길. 천천히 걸어도 40분 정도면 충분한 코스이다. 이씨는 평소 여기까지 걷는다. 서울성곽을 따라 걷거나, 성곽을 넘어 성북동으로 이어지는 여러 갈래 길을 이으면 훨씬 긴 걷기도 가능하다. 포장 잘 된 길이라 굳이 운동화로 갈아 신지 않아도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하지만 경사가 꽤 있어서 운동도 된다.

이씨에게 걷기는 운동보다 사색이 목표이다.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빼놓지 않고 해요. 그래도 거의 매일 걸어요. 전쟁 치르듯 하루를 보내요. 생각할 겨를이 없어요. 걷는 시간만큼은 혼자 생각할 수 있어요. 사실 어디를 걷느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걷는 동안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다는 게 의미 있지."

이씨가 북촌로를 걸으며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만든 그릇이 한국을 넘어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됐다. 뉴욕의 세계적 요리사 장조지 봉게리히텐(Vongerichten)과 그의 한국계 아내 마르자(Marja)가 출연한 TV프로그램 '김치 크로니클즈(Kimchi Chronicles)'에 이씨의 그릇이 사용됐다. 미국 PBS방송을 통해 뉴욕은 오는 5월 8일부터, 미국 전역과 세계 60여개 국가에서는 오는 7월부터 방영될 계획이다.

이씨는 "빨리 좋은 그릇을 많은 사람들 식탁에 올려야겠다는 조바심에 마음이 급하고 괴로웠는데, 이제 사라졌다"고 했다. 편해 보이는 그의 얼굴 뒤로 벚꽃이 다시 바람에 흩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