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김윤덕의 사람人] 아이에게 웃음을 찾아줬다… 그녀는 자폐아의 수호천사

벽과 바닥에 아이는 무차별로 머리를 찧어댔다. 의자와 컵을 집어던지고, 제지하는 어른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이제 겨우 여덟 살. 치료가 시작됐다. 벽과 바닥을 스티로폼과 양탄자로 감싼 작은 방. "우리 실로폰 쳐볼까? 이렇게 치는 거야." 꿈쩍도 않자 교사가 아이의 손을 잡고 실로폰을 치게 한다. 화가 난 아이가 닥치는 대로 물건을 집어던진다. 교사가 아이의 어깨를 누르며 제지한다. "재훈아, 우리 다시 해볼까?" 아이가 마지못해 막대로 건반을 몇 번 두드린다. "이야~ 잘했어. 정말 잘했어." 교사가 아이의 입에 과자를 넣어준다. 두 달간의 치료, 아니 치열한 싸움. 아이는 서서히 달라졌다. 치료 전 15분당 290여회의 자해행위를 보였던 아이는 두 달 뒤 한 번도 자해행위를 하지 않았다. 울부짖는 대신 아이는 해맑게 웃었다. 이듬해 재훈이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정보인(66·사진) 교수. 국내 발달장애아 치료의 대모로 불리는 그녀는, 지난해 연세대 작업치료학과를 정년퇴임 할 때까지 이 감동의 '드라마'들을 20년간 만들어왔다. 최근엔 중증장애아들에 대한 그 생생한 치료과정을 한 권의 책과 DVD 동영상에 담아 세상에 내놨다. '동영상으로 보는 응용행동분석 치료'(청람). "자폐 등 발달장애아를 자녀로 둔 부모들이 교재로 삼아 아이를 훈련시킬 수 있도록 치료 과정을 담았어요. 국내에는 응용행동분석을 통한 발달장애아 치료를 집중적으로 배우고 실습할 전문 기관이 없거든요. 국가가 해주지 않으니 저라도 부모들이 기댈 언덕이 돼줘야겠다 싶었지요."

발달장애아 수는 해마다 늘어나는데 장애를 그저 개인의 불행으로만 여기는 우리 사회의 인식 수준에 정 교수는 불만이 많았다. "그래서 뭔가를 시작해보려고요. 퇴임했으니, 이제 책상머리를 벗어나 '우리' 아이들이 있는 현장으로 가보려고요."

◆"이거 완전히 동물이구먼!"

―책 한권에 무려 10만원이다. 올 컬러 하드커버 사진집도 아닌데 왜 이리 비싼가.

"비싸다고? 내가 제자들과 함께 20년, 아니 30년을 연구해서 얻은 학문적 성과가 여기 다 있다. 그만한 가치가 없겠나. 장애아 치료과정, 훈련과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DVD 동영상만 3시간 반이다. EBS 40분짜리 프로그램 하나가 얼마인 줄 아시나?"

―수익금을 연세대 작업치료학과와 원주 사회복지시설인 '천사들의 집'에 기증한다고 책에 쓰셨더라.

"국내에 응용행동분석 전문치료사들을 많이 양성해야 하니까. 그리고 '천사들의 집'은 내가 우리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사는 중증장애아들을 치료 실습하게 허락해준 곳이다. 이번 책에 실린 사례도 대부분 작업치료학과 학생들이 '천사들의 집' 아이들을 치료하면서 얻은 성과들이다."

―동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자기 얼굴을 주먹으로 때리는 아이, 먹은 것을 다 토해낸 뒤 그걸 다시 핥아먹는 아이, 남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하는 아이.

"인권의 사각지대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이런 아이들을 사회가 방치하면 골방에 몸이 묶인 채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얘기다."

―국가에 불만이 많으신 것 같다.

"발달장애인들을 위한 자해행동 치료시설을 만들어야 한다고 오랫동안 주장해왔다. 20여년 전에도 자해행동치료 동영상 테이프를 만들어 청와대에도 가고, 국회의원들도 찾아갔다. 테이프를 본 청와대 복지비서관이 그러더라. '이거 완전히 동물이구먼!' 침대 벽과 모서리에 머리를 박는 아이를 보고 내뱉은 말이다. 아, 정말 충격적이었다."

―도움은 받으셨나?

"전혀. 국회 해당 상임위에서는 자해행동 동영상까지 상영하고 예산이 잡혀 거의 성사되는 줄 알았는데, 예결위에서 날아가 버렸다. 다른 사안에 비해서 중요하거나 절박하지 않다는 거지. 장애인에 대한 우리의 인식 수준을 절감했다."

◆자폐, 1~2세 때 치료하면 완치된다

―결국 삼성의 도움을 받아 2007년 서울시립어린이병원에 '자해행동치료실'을 만드셨다.

"우리나라 최초로 '자해행동치료실'이라는 간판을 달고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넘어야 할 산들이 많더라. 가장 큰 문제는 인력이었다. 자해행동을 하는 아이는 그 거친 행동 때문에 여러 명의 보조치료사가 달라붙어야 한다. 아이들이 바닥과 벽에 있는 대로 머리를 쿵쿵 박으니까. 그 때문에 기존에는 자해행동 아이들의 손발을 침대에 묶어놓는 경우가 허다했다. 미국에서 이렇게 하다가는 법으로 처벌받는다. 아기에게 소변훈련을 시킬 때 오줌을 팬티에 누는 한이 있더라도 기저귀를 채우면 안 되는 것처럼 환자들을 묶어놓고서는 치료의 진전을 이룰 수 없다."

―삼성에서 지원하는 예산이 부족했다는 뜻인가.

"그렇지 않다. 전체 예산에서 인건비로 써야 하는 금액이 제한돼 있는 탓이었다. 그래서 서울시장에게 보조치료사를 충원해달라 간곡하게 편지를 드렸는데, 그런 편지를 시장에게 써서 병원을 난처하게 했다고 병원 사람들로부터 욕만 엄청 먹었다."

―서울시립어린이병원의 자해행동치료실은 지금도 운영되고 있다.

"나는 첫 1년 동안만 치료실에서 일했다. 기반을 잡고 나온 셈인데, 사실 아쉬운 점이 많다. 학교를 그만두고 올인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고. 병원 측에 물어보니 최근에 치료사가 2명에서 4명으로 증원됐다고 하더라. 명칭도 '행동치료실'로 바뀌고, 발달장애아동들의 문제행동을 주로 치료하고 있다. 자해행동 전문 치료실의 기능이 일부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국내에서 자해행동치료실 개설을 허용한 유일한 병원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시립어린이병원 당국의 열린 자세에 큰 점수를 주고 싶다."

―자해행동을 보였던 재훈이, 예찬이의 경우를 보니 2~3개월 치료로 상당한 성과를 보이더라.

"예찬이는 기아 상태로 발견돼 여주 재활원의 보호를 받다가 자해 증세가 심해 서울시립어린이병원으로 후송된 경우였다. 나와 만나기 전까지 6년 동안 몸이 결박된 상태에 있었고 신경안정제를 포함해 약만 열 몇 가지를 먹고 있더라. '처음부터 다시'라는 생각으로 서너 달 동안 정말 치열하게 치료했다. 통에 블록 집어넣기, 고리 걸기, 사다리 건너가기…. 차츰 바지를 스스로 입고, 나중엔 치료사와 공 던지기 놀이도 하고 매점 가서 물건도 사고 물놀이도 즐길 수 있게 됐다."

―그렇게 단순한 놀이로 치료가 이뤄진다는 게 신기하다.

"발달장애아들에겐 'if…then'을 가르치는 게 우선이다. '벨을 누르면 소리가 난다'는 식으로 자신의 행동에 결과가 0.1초 안에 나타나야 동기부여가 되고, 반복 훈련을 통해 일상생활까지 스스로 할 수 있는 수준이 된다. 문제는 이런 치료가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상태가 조금 호전되면 보호시설로 보내지고 다시 방치된다. 예찬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생각하면 죄책감에 가슴이 아프다."

―자폐를 비롯한 전반적 발달장애의 조기치료는 정말 가능한 것인가.

"자폐는 뇌의 신경세포 중에 사회적 상호작용을 담당하는 신경계 세포가 잘못되어 발생한다고 보고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자폐는 한두 살 때나 적어도 3세 전에 조기치료·집중치료(주당 40시간 내외의 맞춤형 개별치료)에 들어가면 40~50%의 자폐아동이 완치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국내에 그런 전문시설이 없으니 발만 동동 구르다가 부모들이 직장 때려치우고 집 팔아서 미국으로 건너가는 것이다."

―국내 유수의 대학병원들에서는 자해행동치료실 유치에 왜 관심이 없을까.

"돈이 안 되니까. 병원뿐 아니라 우리 사회가 모두 정상을 향해 가는 것에만 관심이 있지 않나. 적어도 국립병원 한 곳에는 발달장애아를 위한 자해행동치료센터가 있어야 한다. 그건 국격을 나타내는 척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