숯을 매달았더니… 우아한 수묵화가 그려졌다

이 남자의 숯과 아크릴에 수많은 기업이 홀렸다. 그의 손이 닿으면 숯 조각도 흑요석처럼 광채가 나고, 아크릴 비즈도 크리스털처럼 찬란하게 반짝인다. 설치미술가 박선기(45).

서울 신라호텔은 지난 2006년부터 매년 수만 개의 투명 아크릴 비즈를 나일론 줄로 묶어 만든 박선기의 작품 '조합체(An Aggregate)'를 천장에 매달아 로비를 장식하고 있다. 크리스털 샹들리에를 연상시키는 작품은 각기 다른 길이의 줄에 매달린 비즈가 허공에서 한데 모여 물방울이 쏟아지는 듯한 형상을 빚어낸다. 삼성물산 서초 사옥에는 나일론 줄에 매달린 수천개의 숯 조각이 소용돌이를 이루는 박선기의 작품이 설치됐다. 이 작품의 제목도 '조합체'다.

현대카드 여의도 본사, 부산 신세계 센텀시티, 스페인 이비자 그랑 호텔, 아랍에미리트 왕자의 저택에도 박선기의 작품이 설치돼 있다. 홍콩·중국 등에서도 주문이 들어온다.

경기도 남양주의 작업실에서 만난 박선기는 “‘매달기 작업’을 처음 시작했던 대학생 땐 ‘과연 이걸로 밥 먹고살 수 있을까’ 싶었는데 우리나라 건물들의 로비 천장이 높아지면서 ‘매다는 작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난 덕에 먹고살 걱정을 안 해도 되게 됐다”고 말했다. 작업실 화이트보드에 올 한 해의 일정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10여명의 조수로도 손이 모자라 동네 주민들의 일손까지 빌려 색색의 아크릴 비즈를 줄에 묶고 있던 참이었다. “곧 개관할 롯데백화점 중국 톈진점에 들어갈 작품을 만들고 있는 중이에요. 유성이나 물이 쏟아지는 것 같은 이미지를 주려고 합니다.”

박선기는 중앙대 조소과에 재학 중이던 1990년대 초반 학교 석조장에 널려 있던 돌조각을 낚싯줄에 매달아 봤다. 그러나 곧 ‘돌’이라는 재료를 포기했다. 무게 때문에 줄이 끊어지면 사람이 다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밀라노에서 유학하던 1990년대 중반 가벼우면서도 자연의 느낌을 낼 수 있는 ‘숯’으로 재료를 바꿨다. 수천개의 숯덩이를 낚싯줄에 매달아 쓰러진 나무 둥치 형태를 만들어 밀라노에서 열린 그룹전에 출품했다. “숯의 검은색, 나일론 줄의 투명한 빛깔, 작품의 그림자 등이 한데 어우러지면 수묵화 같은 느낌을 줘요. 서양 사람들이 ‘동양적 아름다움’이라며 좋아했죠.”

이 작품으로 ‘매다는 코리안(suspending Korean)’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유명해진 그는 밀라노의 로렌스 루빈 갤러리에 전속돼 탄탄대로를 걸었다. 기둥, 아치, 나무 등 숯으로 갖가지 형태를 만들었다. 2004년 귀국, 회화의 원근법을 차용한 조각작품 ‘시점놀이’를 선보였고, 2006년엔 김종영조각상을 받았다. ‘숯’에서 ‘아크릴’로 재료를 다변화한 건 2007년부터. 신라호텔 로비 장식 의뢰를 받은 것이 계기였다. “신라호텔은 공간이 너무 어두워서 숯으로 하면 도무지 분위기가 안 살겠더라고요. 첫해에는 플라스틱을 썼는데 이듬해부터는 아크릴로 바꿨어요. 조명만 잘 이용하면 값싼 재료로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낼 수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