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0개 시험관… 그 속에 생명공학 '보물'이

지난달 28일 대전 대덕연구단지의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연구동. 복도에 늘어선 허름한 냉장고들에 두꺼운 자물쇠가 채워져 있다. 오믹스융합연구센터 김동욱 박사가 한 냉장고의 문을 열자 새끼손가락보다도 작은 5000여개의 플라스틱 시험관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섭씨 영하 80도에 보관된 이 시험관들이 연구진이 자랑하는 '효모 라이브러리(library·도서관)'다. 도서관에 다양한 책들이 가지런히 정리된 것처럼 여러 가지 효모들을 정리해놨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시험관 속엔 생명공학의 '보물'들이 숨겨져 있다. 김 박사는 "10년 동안 100억원을 투자해 만들어 단위 면적으로 따지면 세계에서 가장 비싼 도서관일 것"이라며 "도서관에서 세상을 바꿀 아이디어를 얻는 것처럼 효모 도서관에서도 수조원의 매출을 올릴 신약이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사람 유전자 기능 알아보는 데 유용

효모는 빵이나 술을 발효하는 데 쓰이는 미생물이다. 세포 하나로 이뤄진 미생물은 세포가 분열하고 죽는 과정이 사람 세포와 비슷해 생명현상을 연구하는 데 주요 재료로 쓰인다. 특히 효모는 다른 미생물들과는 달리 핵을 갖고 있어 유전자 연구에서 매우 유용하다. 핵 안에는 유전자들이 가지런히 모여 있어 관찰하기도 좋고 조작하기도 쉽다.

연구진은 특히 '폼베(S. pombe)'라는 효모 종(種)에 주목했다. 5000여개에 달하는 폼베의 유전자 중 상당수가 인간의 것과 비슷하다. 인간 유전자 연구를 효모로 대신할 수 있다. 연구진은 10년의 작업 끝에 지난해 5000여개의 유전자를 각각 하나씩 없앤 돌연변이 폼베 5000여개를 만들어 이른바 '폼베 라이브러리'를 완성했다. 유전자의 기능을 알려면 해당 유전자를 없애고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보면 된다.

냉장고 안의 시험관에는 2000만~1억 마리의 폼베들이 1mL의 액체 안에 얼려진 채로 보관돼 있다. 필요할 때마다 쌀 한 톨만큼만 떼어내 녹여서 쓴다. 폼베의 몸 길이는 약 20㎛(마이크로미터·1㎛는 100만분의 1m).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양쪽 끝이 둥글게 생긴 막대 모양이다. 연구원 내 프레드 허친슨 암연구소 유향숙 박사는 "폼베의 유전자 5000여개 중 약 2000개가 사람과 비슷한 것으로 알려졌다"면서 "라이브러리를 구축한 이후 이들 유전자가 어떤 기능을 하는지 하나씩 알아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연구진은 이미 1100여 가지 유전자의 기능을 알아냈다.

◆약효·독성시험 단축해 신약 개발 앞당겨

폼베 라이브러리는 유전자 연구뿐 아니라 신약 개발에도 유용하게 쓰일 전망이다. 예컨대 제약사가 개발한 치료물질이 5000개의 유전자에 미치는 영향을 각각 알아보려면 5000번의 실험을 해야 하지만, 폼베 라이브러리를 이용하면 한 번에 끝낼 수 있다. 5000종의 폼베를 한군데에 모아놓고 치료물질을 넣은 다음, 특이 반응을 보이는 폼베만 골라내면 치료물질이 어떤 유전자에 작용하는지를 바로 알아볼 수 있다.

폼베는 번식 기간이 짧아 수십 세대 떨어진 후손을 빨리 볼 수 있는 장점도 있다. 폼베가 1세대를 거치는 시간은 불과 3시간. 20세대를 연구하는 데 3일이면 족하다. 약물의 독성이 후손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려면 실험동물을 여러 세대에 걸쳐 실험해야 한다. 생쥐로 같은 실험을 하려면 3개월이나 걸린다. 유향숙 박사는 "생쥐를 이용한 실험이 더 정확하지만 폼베를 이용해 먼저 실험하면 어떤 물질로 생쥐 실험을 해야 하는지, 치료제가 어디에 작용하는지를 빨리 알아볼 수 있어 결국 시간과 비용을 줄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미 국내 제약사 3곳에서 항암제를 개발하며 효과를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