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청년작가' 최인호, 암투병 3년 만에 입 열다] "하여튼 희한하게 살았어… 요즘은 아내 사랑, 순도 100%야"

공군 병장 최인호는 1970년 제대한 뒤 복학하자마자 연세대 교육학과 출신 동갑내기 황정숙과 결혼했다. 스물 다섯살이었다. 주례는 소설가 황순원(1915~2000) 선생. 그러고는 서울 북아현동 복수목욕탕 2층의 15만원짜리 전세방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그는 "가스 사형실 같은 방에 엎드려서 날마다 글만 썼다. '타인의 방'을 쓰니까 김장배추 10포기를 살 수 있었다"고 그 시절을 떠올린 적이 있다. 이제 결혼한 지 만 41년. 그는 "아프고 보니 마누라에게 제일 미안하다"고 했다.

―젊은 시절 스타 작가였던 당신은 아내 속도 무던하게 썩였다. 이제 나이 들어 병수발이나 들게 만든다고 역정은 없으신가.

"(껄껄 웃으며) 그건 따지는 게 아니야. 정말 참, 참 하여튼. 희한하게 살았어. 내가 좋아하는 말인데, 불교에 이런 말이 있어. '낮게 가려면 바다 밑까지 가고, 높게 가려면 산꼭대기까지 가라'. 기독교에도 그런 말이 있어. '네가 뜨겁거나 차라리 차가워라. 네가 미지근하면 뱉어버리겠다'. 내가 최소한 미지근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 가톨릭에 그런 말이 있어. '죄가 깊은 곳에 은총도 깊다'. 마누라랑 나랑 둘이 한몸인데, 잘해주고 안 해주고가 어딨니. (다시 껄껄) 내가 마누라 과부 만들 수도 없잖아. 하여튼 젊은 의사들이 나한테 그래. 최 선생님처럼 독한 사람 없다고. 항암치료 받으면서 이렇게 머리카락 안 빠지는 사람도 처음이래. 어차피 고통스럽고 괴로운데, 죽겠다고 그러면 뭐하니, 누가 도와주니. 기꺼이 견디는 게 낫지. 이번에 쓴 장편은 아내에게 바치는 책이야. 아프고 나니까 제일 미안한 게 와이프더라고. '나는 이 작품을 평생 동안 스승이자 벗이자 수호신인, 사랑하는 내 아내 황정숙 아나스타샤에게 바칩니다.' 정식으로 작가의 말에다 썼어. 내 작가 인생(44년) 동안 책에 쓰는 '작가의 말'에 아내 얘기 쓴 건 처음이야."

―음식 들기는 괜찮으신가.

"먹는 게 힘들어. 아무래도 침샘 근처니까. 요즘 구상이 하나 있어. 음식의 맛을, 그 기억을 잊어버린 사내가 식당에 앉아서 음식을 맛있게 먹는 여자를 몇 시간째 지켜보는 거야. 그리고 생각하지. 내가 옛날에 먹었던 맛은 어떤 거였을까. 이거 알려지면 누가 먼저 쓸 텐데?(웃음)"

―소설 거리, 많이 쟁여 놓으신 모양이다.

"맞아. 많아. 모르겠어. 앞으로의 나. 최인호 제1기의 문학은 등단하면서 쓴 현대소설이고, 내가 왜 1987년에 가톨릭에 귀의했잖아. 그때가 제2기의 문학이야. 허락된다면 이제 제3의 문학이 시작됐으면 좋겠어. 그리고 이제는 내가 쓰고 싶은 글만 쓰겠어. 그러니까. 내 즐거움으로 쓰는 글들이야."

―이번 소설 교정은 끝났나.

"내가 보는 교정은 끝났어. 그건 말할 수 있겠다.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많이 본 교정이 없어. 내가 거의 교정을 안 보는 사람인데, 늘그막에 옥동자를 낳았나(웃음)."

―(웃으며) 왜 이렇게 잘난 체를 하시나.

"차라리 우울증이라도 걸리면 좋겠어. 나는 못 걸려. 난 히스테리는 있어도 우울증은 없어. 다만 한 가지. 이건 사실이야. 기뻐. 기뻐. 만약 신이 허락하신다면 내 진짜 문학은 이제부터 시작일 수도 있어. 요즘 아주 묘해. 아주 순간적인 절망감, 순간적인 근심, 그리고 순간적인 벅찬 기쁨. 조수간만의 차가 아주 심해. 그런데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니까 뻘밭이 생겨. 허허허. 내가 말은 이래도 새벽 세 시 반에 잠이 깨요. 뻘밭이 보여. 아, 오늘은 어떻게 하루를 버티지? 내가 도통했다면 뻘밭에 조개가 없겠지. 그런데 뻘밭은 풍년이야. 우리 마누라가 재밌는 얘기 하나 하더라고. 당신만 즐거우면 됐지, 뭐하러 인터뷰하느냐고. 창고에서 은밀하게 포도주가 익어가는 즐거움이 있을 것 아니야. 그러니 나도 속물이지. 내가 지금 멋있게 얘기하는 거라면 내가 개××야. 나는 받아쓴 거야. 그런데 받아쓰려면 깨어 있어야 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더듬이를 곧추세워야 하는 거라고. 내가 만약 암에 안 걸렸다면 이 소설 못 썼을 거야. 내가 생각해도 기적이야. 내가 멋있게 얘기하느라고 이렇게 얘기한다면, 내가 개××라고."

1970년대 도시적 모더니티의 진경을 보여줬던 최인호 문학은, 1987년 가톨릭 세례를 받은 뒤 지고(至高)와 영원(永遠)의 세계로 이주했다. "문학적 진화는 중단된 대신 심리적 평안을 얻었다"고 문학평론가 남진우는 말했다. 이번 최인호의 새 장편소설이 문학적 진화일지 심리적 평안일지 여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남들의 평가와 상관없이 최인호·황정숙 부부만큼은 이 은밀한 포도주를 만끽하리라는 것. 작가의 쾌유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