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정교해진 보이스 피싱 조직도 다국적 기업화

"신한은행 계좌 있으시죠? 요즘 은행이 시끄럽습니다. 영업정지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빨리 다른 은행으로 옮기세요."

지난해 11월 경기도 용인에 사는 A씨는 금융감독원에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처음엔 '무슨 소리인가' 했지만, 듣고 있으니 불안했다. 당시 언론에선 연일 '신한은행 사태'에 대한 기사가 쏟아지고 있었다. "전화를 끊지 마시고 지금 불러 드리는 계좌로 이체해주세요. 서둘러야 합니다. 당장 내일부터 거래가 정지될 수 있습니다."

A씨는 홀린 듯 1억9800만원을 이체했다. 전화를 건 사람은 금감원이 아니라 전화금융사기단이었고, 영업정지나 계좌동결은 모두 거짓말이었다. A씨는 속았다는 것을 알고 지급정지를 신청했지만, 이미 3000만원은 빠져나간 뒤였다. 그는 "국내 발신번호가 찍혀 있고, 내 신상 정보도 알고 있어 꼼짝없이 속았다"고 경찰에 하소연했다.

'보이스 피싱(전화금융사기·Voice Phishing)'이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다. '피싱(낚시질)'이라는 말 그대로, 하루에도 수백~수천 건의 전화가 중국의 콜센터에서 황해(黃海)를 건너와 한국인들의 돈을 놓고 '낚느냐' '낚이느냐'의 싸움을 벌이고 있다. 인터넷에 보이스 피싱 사기단을 골탕먹이는 통화 녹음 내용이 우스갯감으로 나돌고, 개그의 소재로 등장할 정도로 범죄 자체가 일상화됐다. 올 들어 4개월 동안 서울에서만 1000건에 가까운 954건의 피해사례가 신고됐다. 이는 2006년 첫 피해가 발생한 이후 가장 많은 수준. 최근에는 보이스 피싱 사기를 당하면 일정 한도 내에서 보상해주는 보험까지 등장했다.

◆정교하다했더니… 범죄용 시나리오는 한국인들 작품

보이스 피싱 피해자들은 대부분 "감쪽같이 속았다"는 반응을 보인다. 최근 경찰은 한국인들이 개입해 범죄 대상별로 '맞춤형 시나리오'를 만들어 내고 있는 정황을 포착했다. 소위 피해자를 '낚기' 위한 시나리오가 세태의 흐름을 기가 막히게 짚어내는 것도 한국인들이 개입돼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국내 굴지 금융기관의 경영권 분쟁이 소재가 되는가 하면, 지난달 농협 전산망 사고 이후에는 "전산망에 문제가 있어 계좌를 옮겨야 한다"면서 농협 예금자들을 노리는 수법이 유행했다. 구제역이 한창이던 올해 초에는 축산 농가의 '가축 매몰 보상금'을 노린 시나리오가 대세였다. 보이스 피싱은 이를 통해 나날이 '리얼리티'를 높여가고 있다.

경찰서 전화번호를 발신번호로 이용해 경찰을 사칭하거나, 대검찰청이나 국세청 '가짜 홈페이지'를 만들어 놓고 신상 정보를 입력하도록 유도하는 수법도 있다. 경찰은 "시나리오가 워낙 치밀해 대학교수, 공무원, 약사 등 전문직 종사자들 사이에서도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며 "한국인들이 개입하지 않으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스토리"라고 말했다.

경찰은 최근 붙잡은 한 하부 조직원이 털어놓은 중국 지린성 외곽 '콜 센터'의 내부 구조와 운영 방식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방 6개짜리 아파트를 콜센터로 꾸며 놓고 방마다 조선족 전화 상담원, 시나리오를 맡은 한국인, 한족 IT 기술자 3명이 앉아 18명 6개 팀이 활동하고 있더라는 것. 특히 한국인 조직원은 신문·방송·인터넷을 보면서 사람들이 솔깃할 만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피해자들의 통화 내용을 모니터링하며 디테일(세부 사항)을 다듬는 '작가' 역할을 맡고 있었다고 한다.

◆철저한 기업형 조직으로 운영

이들을 수사해 본 경찰 관계자들은 "범죄 조직이 아니라, 기업"이라고 입을 모은다. 팀별로 철저한 성과급 보상이 이뤄지고, 휴일 근무도 지켜지고 있다. 중국 최대 명절인 춘절 기간에 피해 사례가 눈에 띄게 줄어드는 것도 그 때문이라는 것. 국내에서 검거된 조선족들을 취조하다 보면, "저 사람은 우리 '회사' 사람이 아니다"는 식의 진술이 나온다. 현금을 인출하는 '인출책'은 최근 무비자로 30일간 입국할 수 있는 대만인들이 관광객으로 위장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들은 항공료와 숙박료, 일당 10만~15만원을 받고 인출 금액의 5% 정도를 갖는 '프리랜서'. 순식간에 20군데 ATM기를 돌며 1억원을 인출해가는 베테랑도 수두룩하다. 경찰 관계자는 "콜센터와 수금조직, 대포통장을 만들고 한국인들의 신상정보를 수집하는 조직 등 철저히 분업화돼 있다"며 "전주(錢主)는 대만, 콜센터는 중국, 영업은 한국에서 이뤄지는 국제적 범죄 기업"이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한국을 대상으로 한 보이스 피싱이 '돈이 된다'는 소식에 우후죽순으로 중소규모 조직이 생겨, 중국의 콜 센터마다 구인난을 겪을 정도라고 한다.

과거에는 노년층을 노렸다면, 요즘은 경제활동이 왕성한 40~50대 중장년층을 노리는 것도 특징이다. 올해 서울에서 발생한 보이스 피싱 사건 중 50대 피해자가 절반에 육박하는 40.6%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각종 해킹이나 불법 거래를 통해 유출된 개인 신상정보는 이들에게 훌륭한 먹잇감이다. 요즘 보이스 피싱 사기단은 가족 관계나 직장 등 기초적 신상 정보를 파악한 후 피해자들에게 접근한다. 한 경찰 관계자는 "수사를 하다 보면 우리나라 국민의 30% 정도는 가장 업데이트된 개인신상 정보가 유통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납치 빙자 사기'는 학원이나 학교 교사를 사칭해서 "아드님이 오늘 학원에 나오지 않았는데, 연락이 되지 않아요"라는 전화를 걸어 불안하게 만든 후, 확인할 틈도 주지 않고서 "당신 아이를 데리고 있다"는 협박 전화를 걸어온다. 일단 미끼를 물면, 손에서 전화를 놓지 못하게 하는 것이 전형적인 수법. 돈이 입금되면 퀵서비스를 통해 대만인이나 조선족, 한국인들로 구성된 인출 담당들에게 '대포통장'을 전달하고 순식간에 돈을 빼간다.

◆왜 근절되지 않나

2009년은 보이스 피싱 범죄자들에게 최대의 시련기였다. 그해 9월부터 국제전화에 '국제전화입니다'라는 발신 표시가 의무화되면서 발생건수가 월 50건 미만으로 떨어진 것. 모르는 국제전화 번호가 뜨면 곧 보이스 피싱이라는 인식이 퍼졌기 때문이었다. 당시 부도가 난 보이스 피싱 조직이 많았다고 한다.

경찰은 이들이 '국제전화' 메시지가 뜨는 것을 피하기 위해 최근 국내 인터넷 전화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여기에 경찰서나 금융감독원, 검찰청의 실제 번호를 발신 번호로 띄우는 수법을 쓰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지난 2일 1억5000만원 피해를 입힌 농협 사칭 보이스 피싱은 '강남경찰서 사이버수사대'의 전화번호를 버젓이 사용했다. 강남서 관계자는 "최근 사무실로 보이스 피싱을 당한 것인지 묻는 피해자들의 전화가 자주 걸려오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근무중인 현직 경찰관의 이름까지 파악해 사칭하는 경우도 있다.

경찰은 국내에서 송금책과 인출책, 통장모집책 등을 검거해 이들의 '손발'을 잘라버리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하지만 콜센터가 있는 중국 본토까지는 힘이 미치지 못한다. 서울지방경찰청은 지난 2월 '전담팀'까지 구성했다.

전문가들은 "중국과의 공조 수사를 강화하고, 인터넷 전화라도 '국제전화' 발신 표시를 의무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인터넷 전화 서비스를 하는 통신 사업자들이 허위 발신자 번호를 띄우지 못하도록 관리할 필요도 있다. 경찰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2008년까지 전화 금융사기가 많았지만, ATM기 앞에서 휴대전화 사용을 금지하는 조치가 내려진 후 사실상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 보이스 피싱(Voice Phishing)

전화를 걸어 범행 대상자의 개인정보를 빼내거나 송금을 요구하는 금융사기. 피싱은 인터넷에서 해킹을 통해 개인정보를 낚시질(Fishing)하듯 빼돌린다는 의미. 보이스 피싱은 전화(phone)를 이용한다는 의미에서 철자를 'f'대신 발음이 같은 'ph'로 바꿔 쓴 것이라고 한다. 'fishing'과 'private data'(개인정보)를 합성한 조어라는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