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동네 의사 송태호의 진료일기] '용한 의사'는 없다

나는 동네 의사다. 한마디로 동네 병원에서 1차 진료를 맡고 있는 의사다. 물론 나는 의대를 졸업하고 수련의와 전공의 과정을 대학병원에서 마쳤으며 국가에서 인정하는 내과 전문의 자격을 갖고 있다. 의과대학원에서 동맥경화에 대한 연구로 의학박사 학위도 받았다. 그러나 동네 병원의 진료실은 그런 전공과 별로 상관이 없다. 실로 다양한 증상의 환자들을 만난다.

동네 환자들의 평균 연령은 50세를 상회한다. 이런 진료환경에서 가장 큰 애로사항은 환자의 질병이 아니라 환자와의 소통 장애다. 환자와의 소통은 의료행위의 시작이요 끝이다. 진료는 의사만의 몫이 아니다. 환자의 반응이 없다면 의사의 진료는 일방통행이 된다.

환자들은 대개 두 가지의 태도를 취한다. '어디 내 병을 알아내는지 보자' 하는 자세로 의사에게 최소한의 정보만을 제공하거나 자신의 병력을 꼼꼼히 말하며 증상에 대해서도 능동적으로 털어놓는다.

수동적인 환자에게 의사는 저절로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의무기록도 훨씬 더 꼼꼼히 하고, 시진·청진·촉진·타진·문진의 5대 진료도 자세히 하고 진단을 위한 검사도 많이 하게 된다. 그러나 그뿐이다. 증상을 잘 말하지 않으려는 환자에게서 조금의 문제라도 발견되면 상급병원으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반면 병력과 증상을 자세히 말하는 환자에겐 좀 더 성의껏 설명을 하게 된다. 증상 외의 인간적인 관심까지 갖게 되기도 한다. 그야말로 환자와 의사 간의 바람직한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 올바른 진단과 치료가 훨씬 수월하다. 그런 환자들로부터는 '용한 의사'라는 칭찬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용한 의사란 말은 거북스럽다. 의사는 점쟁이가 아니니까.

어쨌든 환자와 의사가 만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의사소통이다. 사람들은 대개 "1시간 기다려 1분 진찰받는다"고들 불평한다. 나는 환자들에게 평소 수첩에 증상을 메모해 둘 것을 권장하고 있다. 어디가 아프거나 궁금할 때마다 그 내용을 적어놓았다가 의사를 만났을 때 보여주면 아주 짧은 시간에도 환자의 증상을 파악할 수 있다. 이렇게 적극적인 환자를 보고 성의없는 모습을 보일 의사는 없을 것이다.

이런 메모는 특히 소아 환자들을 진료할 때 무척 중요하다. 우리 병원에 찾아오는 할머니들의 상당수가 자신들의 손주들을 돌보고 있다. 아이 엄마는 출근하느라 바쁜 아침에 부모님께 아이를 맡기면서 "애가 아프니까 병원에 좀 가주세요"라고만 말하고 회사에 가버린다. 이것이 최악의 의사소통 상황을 만든다. 할머니는 아이가 어떻게 아픈지 모르고, 아이는 표현할 줄 모른다. 이럴 때 부모가 아이의 증상을 관찰한 메모가 있다면 의사에게는 그야말로 '단비'인 셈이다.

좋은 의사의 1차적 조건은 환자와 의사소통을 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의사도 사람이기에 '점쟁이'를 기대하는 듯한 환자 앞에선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환자들은 흔히 "그 의사는 말도 몇 마디 안 하고 진찰을 끝낸다"고 푸념하지만, 의사뿐 아니라 환자도 소통 방법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동네에 말이 잘 통하는 의사가 있다면 복 받은 분들이다. 물론 그 의사도 복 받은 의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