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50년 만에 다시 받은 가르침

"모두 가난했던 1950년대

월사금 못낸 '문제아'들 배려해주신 선생님

반세기 뒤 찾아간 제자에게

"'사람 교육'에 힘써 달라" "명예나 지위에 연연 말라"

간곡하게 당부하셨다"


그날도 나는 몇 명의 급우들과 함께 교실 앞쪽으로 불려 나갔다. 하루 수업이 끝나는 시간, 선생님이 제때 수업료를 못 낸 아이들을 채근하기 위해서였다. 월사금(月謝金)을 못 낸 '문제아'들을 호명할 때면 나는 늘 주역이었다.

6·25 전쟁 직후, 폐허 속에서 초등학교에 다닌 세대라면 누구에게나 아린 추억으로 남아 있을 우리 교육의 아픈 실상이었다. 그 시절은 국가도 가난했고 개개인의 생활도 피폐했다. 아버지가 "운수(運數) 사나우면 망한다"는 운수업을 하다가 몇 번의 사고로 가세(家勢)가 기운 우리 집은 어머니가 텃밭에 돼지를 기르면서 겨우 끼니를 해결하고 있었으니 수업료를 제때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실의에 빠진 아버지는 매일 수도사처럼 가부좌를 하고 끝없이 묵상만 하실 뿐이셨고, 누님과 형님이 방과 후에 잔밥을 거두어 연약한 어머니를 도왔다. 철없는 막내로 자란 나는 이런 처지에도 아침마다 월사금을 졸라댔으니 어머니의 마음이 어땠을까.

"이렇게 미루기만 하면 어쩌노? 성영이는 우리 집에 벤또(도시락) 갔다 주그라." 선생님은 나를 자주 선생님이 드시고 난 도시락을 사모님께 갔다 드리도록 심부름을 만드셨다. 외지에서 전근 오신 선생님의 숙소와 우리 집이 한 마을에 있어서 문제아 줄에서 먼저 빠져나오는 특혜를 누린 셈이다. 선생님은 비단 나의 처지만 배려하신 것이 아니라 친구들의 이런저런 사정을 살펴두시고는 어린 마음들이 상처를 입지 않도록 애를 쓰셨다. 그러다 보니 우리 반의 월사금 납부 성적이 언제나 저조해서 선생님의 고충이 크셨을 것이다. 우린 어렸지만 그런 선생님을 마음으로부터 존경하고 좋아했었다. 시장바닥처럼 떠들다가도 선생님이 들어오시면 우리는 "흡!"하고는 일제히 얌전을 부렸다.

내 생애에 잊지 못할 선생님의 성함은 본관이 진주 강(姜)이시고 '흡족할 흡(洽)', 외자를 쓰신다. 한학과 서예에 능하셔서 우리 학교 대소사에 필요한 휘호는 거의 선생님의 손을 거쳤다. 체벌을 '사랑의 매'인 양 생각해서 바람벽 하나 사이로 이웃 교실에서는 기합받는 소리가 예사로 들리던 시절이었건만, 우리 선생님은 한 번도 우리에게 매를 대거나 언성을 높이는 법이 없으셨다.

지난해 이맘때, 수소문 끝에 나는 선생님을 반 세기 만에 찾아뵈었다. 그동안 선생님은 경북 안동을 중심으로 몇몇 초등학교에서 교장으로 봉직하셨고 교육감까지 역임하신 후 은퇴하셔서 논어(論語)를 벗 삼아 사모님과 여생을 보내고 계셨다. 진작 찾아뵙지 못한 것을 용서해 달라는 제자에게 선생님은 "자네의 근황은 가끔 듣고 있었네. 언젠가 만날 날이 있으려니 하고 기다렸지" 하시며 초등학교 시절의 그 자애로운 미소로 맞아주셨다.

긴 세월 만에 만난 제자에게 선생님은 교육자로서 후회스러운 일이 두 가지 있다고 하셨다. 하나는 그 가난한 시절에 월사금을 못 낸 아이들을 꾸중했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 교육'을 제대로 못해 우리 사회가 혼탁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직 교육 일선에 있는 자네는 이 두 가지를 유념하여 바른 교육에 힘써 주게"하고 간곡하게 말씀하셨다. 실로 50년 만에 다시 받는 가르침이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지만, 그 당시 선생님들은 학생들이 월사금을 내야만 월급을 제대로 받을 수가 있었다. 선생님은 그런 중에도 나처럼 월사금을 제때 못 낸 학생들을 위해 남모르게 대납(代納)도 적잖게 하셨던 터다. 그런데도 그때 순진무구한 동심에 상처를 주었다며 선생님은 반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가슴 아파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선생님의 자성(自省)을 보고 부끄러운 나의 모습을 발견했다. 어려운 처지의 이웃을 도우며 일생을 살아오신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고도 나는 정작 그렇게 살지 못했다. 지나치게 전문교육을 강조하는 이 시대에 인성교육의 실종을 경고하는 것만으로 스스로 '휴먼 프로페서'라고 착각해 온 나 자신이 민망스러웠다. "사람을 만드는 것, 그것이 최고의 예술"이라고 노래한 시인 노발리스의 금언은 은퇴 이후에도 이 나라 교육을 걱정하는 우리 선생님 같은 분들이나 말씀할 수 있을 것이다.

선생님은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 나오는 '功遂身退(공수신퇴)' '生而不有(생이불유)'라는 경구(警句)를 써 주셨다. "공로를 세우되 출세에 연연하지 말라" "명예나 지위가 생겨도 자신의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다.

올해도 곧 스승의 날을 맞는다. 우리 교육이 많은 숙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리나라를 선진국 반열에 올린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은 우리 선생님처럼 훌륭한 스승들이 많은 땀을 흘리신 은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