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 내 인생] 호텔리어·유통업 하다 뮤지컬 배우 된 권영국(70)씨

"첫사랑 그대 지금 어디에…. 한 번씩 생각해요. 나의 뜨거운 시절. 심장은 벌렁벌렁, 가슴은 두근두근…."

요즘 나는 매주 3번씩 서울 흥인동 충무아트홀 6층으로 출근을 한다. 오는 7월 말부터 열리는 거창국제연극제 참가작인 뮤지컬 '인생은 아름다워' 연습을 위해서다. 감독님은 종종 날카롭게 호통을 친다. "관객들이 그래서 공감을 하겠어요? 대사, 정말 자꾸 그렇게 틀리실 거예요!" 얼굴이 빨개진다. 격한 춤 동작에 숨이 가쁘다. 때론 주저앉고도 싶지만, 무대에 서는 날을 상상하며 다시 목을 가다듬는다.

노래, 그리고 무대. 50년 동안 나의 마음속에 몰래 키워온 꿈이다. 고등학교·대학교 시절 합창단에서 활동하며 노래의 즐거움에 푹 빠졌다. 하지만 음악은 취미일 뿐 직업이 되긴 어려웠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 호텔에서 관리직으로 일하며 무대에 대한 동경을 키웠다. 호텔에선 외국인들이 등장하는 공연이 매일 열렸다. 그들의 모습을 지켜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회사원 시절 내 노래가 빛을 발할 때는 고작 회식 자리에서였다. 노래방이 등장하기 전인 1980년대, '노래를 2절까지 외운다'는 건 꽤 인기 있는 기술이었다. 나는 20곡 넘는 노래를 외워 불러 동료들에게 '밥집의 가수'로 주목받았다.

월급쟁이 생활을 10년 하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것저것 물건을 떼다 수퍼마켓 등에 공급하는 유통업이었다. 트럭 6대를 구해 밤낮없이 사업에 매진했다. 새벽에 나가 물건을 받아오고, 종일 물건을 배달하고, 다음 날 아침엔 전날 거둬들인 돈을 은행에 입금하고…. 사업은 팍팍했다. 호텔에서 일할 때 그나마 취미로라도 즐기던 노래와 음악은 더 멀어져갔다.

사업을 하다 보니 '외상'이 늘어갔다. 빚을 더 얻으면 문제가 생길 만한 상황이었다. 30년 가까운 밥벌이에 몸도 마음도 지쳐 있던 나는 사업을 정리했다. 전형적인 '경상도 남편'인 나는 아내와 종일 함께 지내기가 서먹했다. 함께 뭔가를 해보자는 생각에 복지관 등을 알아보다가 '충무아트홀 연극교실'이란 문구가 눈에 확 들어왔다. '나이 예순여섯, 아직 무대에 설 기회가 남아 있다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내와 함께 연극 교실에 등록했다.

무대에 서는 일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고된 작업이었다. 우리 부부는 남이 보는 앞에서 손과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안절부절못했다. 진땀이 났다. 성북구에 있는 한 모델학교에 등록해 워킹 교육을 받았다. 2007년 11월, 충무아트홀에서 개막한 뮤지컬 '마이웨이' 공연 일정이 잡힌 후엔 대사 암기가 큰 벽이었다. 수험생처럼 대본에 줄을 치고, 연습장에 대사를 베끼기도 하면서 문장들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조연으로 첫 무대에 서던 날 막이 올라갔을 때, 눈앞이 깜깜했다. 수백 개의 눈이 나를 향한다는 부담감에 몸이 굳었다. 내 시선은 허공을 잠시 맴돌았다. 그러나 노래를 하고 춤을 추면서 굳었던 몸은 조금씩 풀려 갔다. 뮤지컬이 끝난 후의 '커튼콜'이 얼마나 짜릿한지, 무대에 서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그날 나는 가수들이 왜 "많은 박수 부탁합니다"라고 자꾸 말하는지를 처음으로 알았다.

공연이 끝난 후 자신감이 붙어 노년의 사랑을 그린 뮤지컬 '러브' 오디션을 봤다. 20명을 뽑는데 140명이 몰렸다. 밤잠 안 자고 연습한 덕에 나와 아내 둘 다 오디션에 합격했다. 공연은 꽤 인기를 끌어 2008년 말부터 6개월 동안 무대를 바꿔 가며 롱런했다.

직장인과 뮤지컬 배우의 가장 큰 차이는 '나'의 존재감인 듯하다. '내'가 빠지면 무대 자체가 사라진다. 나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는 기회인 동시에 큰 부담이기도 하다. 2009년 초, 하루 2차례 '러브' 공연을 할 때였다. 낮 공연이 끝나고 대기실에 갔더니 휴대전화에 문자 수십 통이 와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어머니의 별세 소식을 듣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춰야 할 것인가.' 그러나 공연장을 찾은 수백 명의 관객을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그날 나는 눈물을 삼키고 공연을 마친 후, 밤 10시가 돼서야 어머니의 빈소를 찾았다.

얼마 전엔 춤 연습을 하다 무릎을 다쳤다. 그러나 거창국제연극제가 끝날 때까지 수술을 미루기로 했다. 이번 뮤지컬에서 나는 주연급으로 무대에 선다. 자신을 잃지 않는 마음과 질 수 없다는 끈기만 있다면 아무리 고돼도 인생의 두 번째 문은 열린다. 일흔 넘어 신명나게 춤추고 노래하는, 내가 그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