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한현우의 커튼 콜] "인문학의 위기? 일부 학자들이 만들어낸 말"

사단장의 집무실은 아담했다. '맹호사단'이 배출되는 곳이다. 박맹호(77) 민음사 회장은 여전히 오전 8시 회사에 출근하고 매주 팀장회의를 주재한다. 그는 반세기 가까이 한국 출판계를 이끌며 수많은 편집자를 길러냈다. 그의 의자 뒤로 색색(色色)의 책들이 빛나는 견장(肩章)처럼 호위하고 있었다. 오는 19일 민음사 창립 45주년을 맞는 박 회장을 지난 9일 오전 서울 신사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이날 마침 팀장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민음사 출판그룹 산하의 출판사들(민음사·황금가지·사이언스북스·세미콜론·민음인·비룡소) 대표와 팀장까지 10여명이 일찌감치 회의를 마쳤다고 했다. 박 회장은 "회의를 주재한다기보다 가운데 앉아 있는 것"이라고 했다.

―젊은 직원들이 불편해하지 않습니까.

"불편하지 않도록 합니다. 일절 구박도 잔소리도 안 하죠. 불편하면 말하라고 하고."

―누가 감히 말하겠습니까.

"아니에요. 다 말해요. '회장님, 이제 회의 그만 나오세요'라고. 저는 가급적 들어주고 얘기는 안 하는 쪽이에요." 그는 아들뻘 기자에게 줄곧 낮은 톤으로 '저는… 합니다' 투로 말했다.

―젊어서도 들어주는 편이었습니까.

"그때는 독재였죠. 심할 정도로. 모든 결정을 제가 다 했어요."

―언제부터 유(柔)해졌습니까.

"6년 전에 간 이식 수술을 했어요. 그때까지도 늙었다는 생각을 안 했어요. 철이 없는 거지. 그런데 막상 수술실에 홀랑 벗고 누우니까, 아, 이제 지옥의 문턱이구나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살면서 잘못한 게 뭔가, 너무 사람들을 닦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수술 끝난 다음 날 눈을 뜨고 나서야 철이 들었습니다."

박 회장은 40대 후반에 이미 C형간염 판정을 받고 술·담배를 끊었다. 이 병은 오랜 시간에 걸쳐 간을 괴롭히다가 결국 못 쓰게 만든다. 그는 2005년 10월 중국 톈진중앙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그는 앉았다 일어날 때면 힘겨워하면서 "역시 이착륙이 문제야"라고 말했지만, 전반적으로는 건강해 보였다.

―70대 들어서 철이 들었다면 저는 아직 멀었겠군요.

"멀었죠. 한참 멀었어요. 저는 40대 때 관악산 구석구석을 안 뛰어다닌 곳이 없어서 '관악산 다람쥐'라고 했어요. 주말엔 산에 뛰어다니고 주중엔 일만 하고, 그러니까 철이 없죠."

―철이 없어야 일에 열중할 수 있습니까.

"이것저것 생각하면서 무슨 일을 하겠어요."

―1966년 창업할 때 32세였는데 그 이전엔 무슨 일을 했습니까.

"건달이었죠. 휘문출판사에 한 석 달 나갔고, 그보다는 신구문화사에 신동문·이어령씨 있을 때 거기 놀러 가서 출판계 돌아가는 이야기를 배웠어요. 나중에 창작과비평사 초대 사장을 지낸 신동문씨가 저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어요. 아주 섬세하고 머리가 좋은 분이었죠. 나하고 서울대 동기동창인 이어령은 그때나 지금이나 어드바이스해주고 돈 받는 사람이고."

―민음사 창립 첫 작품이 '요가'란 실용서였지요.

"그게 신동문씨 아이디어예요. 일본 책을 번역해주면서 해보라는 거예요. 그때 한 6000권 팔렸나? 당시엔 굉장한 베스트셀러였죠."

―그다음엔 별로 재미를 못 봤다던데요.

"못 본 정도가 아니라 그때 돈으로 3000만원쯤 빚을 졌어요. 부끄러운 얘기지만 당시엔 우리가 국제저작권협약에 가입이 안 돼 있어서 일본 마루젠(丸善) 출판사의 '건축설계집성'이란 전집을 리프린팅해서 팔았어요. 한 질에 22만원짜리였는데 그걸 외판으로 수천 질 팔아서 빚을 다 갚았죠. 결국 외판에서 손을 떼긴 했지만요."

―외판에서 손을 떼면서 민음사가 색깔을 갖게 됐습니까.

"저희가 단행본 가로쓰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는 것에 자부심이 있어요. 이미 1973년 12월에 발레리의 시집 '해변의 묘지'를 가로쓰기로 내놨습니다. 74년부터 발간한 '오늘의 시인총서'와 '오늘의 작가총서'는 물론이고요. 우리 출판계가 전집류 외판에서 단행본 쪽으로 전환하는 터닝포인트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출판계를 급속히 따라잡은 것도 가로쓰기 덕분이라고 봅니다."

―"한국 사회가 아직도 전방위적으로 이데올로기에 매몰돼 있다"고 말씀해 왔는데, 이데올로기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민음사의 방향입니까.

"우리 문화가 이데올로기로 경화돼서 우수한 작품이 나오지 않는다고 봅니다. 좌파나 우파가 아니면 편들지 않고 인정도 하지 않으니까 문화가 양분돼 버렸고 유연성을 상실했어요. 많이 유연해졌다지만 여전히 밑바닥에 이데올로기가 똬리를 틀고 있죠. 다행인 것은 아동물이나 청소년물은 이념적 편 가르기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어요. 자라나는 세대는 그런 경직성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민음사가 내놓은 문학작품도 한국 사회변혁기의 도구 또는 전위 역할을 하기도 했잖습니까.

"저희는 좌우를 가리지 않고 어느 정도 수준이 된 작품을 발표했어요. 그 작품을 누구든지 자기들에게 유리하면 인용하곤 했죠. 그것까지 말릴 수는 없는 거죠." 그는 "지금은 좌우를 막론하고 출판계가 완전히 상업주의로 경도돼 있는 것이 심하다. 이데올로기를 강조하던 집(출판사)에서 (상업주의가) 더 심하다"고 덧붙였다.

―'나쁜 책'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모든 책은 존재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책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호의와 애정이 있으니까요."

―정치인들이 출마 직전에 내놓는 책도 있잖습니까.

"그건 책이 아니에요. 프로파간다이고 선전 삐라죠. 제게 그런 유혹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대통령 출마하는 사람들, 국회 나가는 사람들…. 미움도 많이 받았죠."

―책을 읽지 않는 것과 나쁜 책을 읽는 것 중 어느 쪽이 낫습니까.

"굳이 고른다면 나쁜 책이라도 읽는 것이 낫다고 봅니다. 책을 읽는 훈련이라도 되니까요. 통속적인 대중소설을 읽다가 세계 고전문학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인문학 출판사로서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 하고픈 말이 있겠죠.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은 일부 학자들이 만들어낸 말이라고 생각해요. '정의란 무엇인가'가 100만부씩 팔리는 걸 보세요. 인문학이 꾸준히 읽혔기 때문에 이렇게 발전한 것입니다. 인문학에는 위기나 쇠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대학에서 철학과가 폐지되고 어문계열도 찬밥 신세인데요.

"그건 일부 대학의 단견(短見)에 불과해요. 앞으로 크게 반성하게 될 겁니다. 인문학으로 인격이 형성되고 사람이 성숙하는데, 그걸 빼놓으면 기계 부품을 생산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국가적으로 얼마나 큰 손해인지 몰라서 그래요. 미구(未久)에 개선되리라 봅니다."

―'출판은 예나 지금이나 벤처사업'이라고 말씀해왔습니다만.

"구매자가 확정된 것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구상해서 수용시켜야 하니까 모험이고 벤처죠. 제 출판 인생이 대부분 새로운 실험과 세계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현재 민음사는 어떤 실험에 도전하고 있습니까.

"한국 사회를 형성해 온 현대사에 본격적으로 도전해볼까 하고 있습니다. 10여년 전 '사이언스북스'를 만들 때 과학의 후진성을 면하려면 출판사가 이론적인 뒷받침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룡소'를 만들 때 아동물 외판이 워낙 막강했지만 '우리 아이들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색깔과 그림을 보게 하자'며 시작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미친 짓이었죠."

박 회장의 삼남매인 상희(49·비룡소 대표)·근섭(47·민음사 대표)·상준(39·사이언스북스 대표)씨는 모두 가업을 잇고 있다. 박 회장은 "불만족스러운 점도 있지만 다들 대체로 잘하고 있다"며 "큰외손자(홍주표)가 미국 뉴욕대 4학년인데, 졸업하면 출판일을 해보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외손자까지 영입되면 3대에 걸친 출판가문이 탄생하는 셈이다. 그러나 현재 박 회장의 장남 근섭씨는 "출판일이 행복하지 않다"며 몇 개월째 일을 쉬고 있다. 박 회장은 장남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인터넷 정보 홍수 속에서도 책의 힘을 믿습니까.

"요즘엔 또 아이폰 때문에 책이 위기라고 하는데, 이 방대한 양의 책을 컴퓨터에 저장할 수야 있겠지만, 그걸 무슨 수로 읽어내겠어요. 책을 뒤적이는 즐거움을 어떻게 포기합니까. 책은 몇천 년을 내려온 인류의 문화유산인데요. 신문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엊그제 신달자 시인이 와서는 여전히 신문으로 모든 정보를 충당한다고 하더군요."

―요즘 아이들은 유치원 때부터 책보다 화면에 익숙합니다. 책의 감성을 모르는 세대가 등장하지 않을까요.

"사람의 성공과 실패는 책이 결정합니다. 결국 책으로 돌아오고 책을 읽는 자만이 생존할 수 있어요. 미국은 학교에 들어가면 일단 고전 100권을 읽게 합니다. 그러니까 그 나라와 사회가 발전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날라리 공화국이 되는 거지 다른 수가 있어요?"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 신정아의 '4001' 같은 내부고발이랄까, 폭로성 자서전이 많이 팔리는 것은 어떻게 봅니까.

"그런 책은 우리 사회에 결국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합니다. 결과적으로 쓰레기에 불과하지요. 그런 책들이 발호(跋扈)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고전이 얼마나 중요한지 웅변하는 것이라고 봐요. 결국 그런 책은 멸망합니다. 출판계는 유독 생성과 소멸이 빠른데, 그런 책을 내는 것은 소멸에 가장 가까운 방법이에요. 민음사가 그런 책을 냈다면 이미 오래전에 없어졌을 겁니다."

충북 보은 출신의 박 회장은 말투가 느린 데다가 말 속 문장의 주·술 관계가 분명치 않을 때가 많았다. 민감한 질문에는 대답하는 척하다가 다른 이야기로 에돌기도 했다. 그러나 출판의 미래와 책의 역할을 말할 때 그의 문장들은 짧았고 주·술 관계도 명확했다. 덩달아 그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이 주제에 관한 한 그는 영원히 '철들' 생각이 없는 듯했다.

―출판인이란 어떤 직업입니까.

"과장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저 스스로는 종합예술가이자 연출자라고 생각해요. 사람들 모아서 연출해야죠, 책 만들어 데뷔시킬 때 어떻게 하면 효과적일까 구상해야죠. 개척정신, 도전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평생을 바쳐서 할 만한 일입니까.

"저는 출판 말고는 아는 게 없는데, 이게 재미있기 때문이에요. 어느 정도냐 하면, 매일 아침 약간의 흥분과 쾌감을 느끼면서 출근해요. 오늘도 새 책을 본다, 어떻게 만들었을까, 표지는 어떨까, 광고는 어떻게 나왔을까, 그런 잔재미가 있어요. 출판 안 해본 분들은 모르는데, 그런 쾌감과 흥분이 평생 계속되는 거예요. 그런 긴장 속에서 사는 것, 그런 즐거움이 없으면 무슨 낙으로 살겠어요. 그런 걸로 머릿속이 꽉 차 있으니까 평생 딴 걸 해보겠다는 생각이 없었던 거죠."

―일본 영화 '원더풀 라이프'에서는 모든 죽은 사람이 천국에 가기 전 '인생에서 단 하나의 행복한 기억을 꼽는다면'이란 질문을 받습니다. 가장 행복했던 단 하나의 기억을 꼽는다면요.

"마누라하고의 삶, 그 전체예요. 그 사람이 내 모든 힘의 원천이었으니까요. 그 어떤 기억도 그것에 비교할 만한 기쁨은 없어요."

박 회장의 부인 위은숙(75)씨는 '건달'이던 남편과 결혼한 뒤 노량진에서 약국을 경영하며 남편의 일을 도왔다. 박 회장은 평소 "민음사가 어려울 때 박카스 팔아서 도와준 사람"이라고 말해왔다. 올해 두 사람은 결혼 50주년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