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 간 폐현수막, 생활예술 변신

누구나 삶의 전기(轉機)를 꿈꾼다. 중앙미술대전 조각 대상(1988), 김세중 청년조각상(1996) 등을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정재철(52·사진)도 예외는 아니었다. 2004년 3월 정재철은 불쑥 한국을 떠나 중국 시안, 인도, 네팔을 거쳐 파키스탄 라호르로 향했다. 서울과 경기도의 구청에서 거둬들인 폐현수막 2000여장과 함께였다. "'삶이 예술이고 여행이 미술이다'라는 것이 인생 모토였죠. 여행을 통한 미술을 하고 싶었는데 우연히 광고 현수막 단속 현장을 봤어요." 장장 7년간에 걸친 '실크로드 프로젝트'는 그렇게 시작됐다.

정재철은 여행에서 만난 현지인들에게 깨끗이 세탁한 폐현수막을 나눠줬다. "자유롭게 사용해 달라고 당부했어요. 6개월 후에 다시 와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기록하겠다고 했죠. 나눠주는 게 구호물자가 아니라는 것, 이 일은 어디까지나 '아트 프로젝트'일 뿐이라는 걸 현지인들에게 명확히 전달했어요."

정재철은 6개월 후 다시 폐현수막을 나눠줬던 곳을 찾았다. 대개 햇빛 가리개로 사용되고 있었다. 간다라 미술의 중심지인 파키스탄 탁실라 한가운데에서 '째즈댄스'라는 문구가 적힌 조악한 푸른색 폐현수막이 차양이 되어 나부꼈다. 네팔의 어느 가정에서는 베갯잇과 벽 가리개, 커튼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정재철은 그 모습을 동영상과 사진으로 꼼꼼히 기록했다.

2005년 말 한국으로 돌아온 정재철은 2차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2008년 1~10월 진행된 이번 프로젝트에선 현지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했다. 파키스탄·이란·터키의 시장 사람들에게 현수막을 나눠주면서 햇빛 가리개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이스탄불의 어느 골동품 가게 주인은 "내 가게에는 이게 어울린다"면서 '개인회생·파산'이라고 적힌 노란 현수막에 빨간 테두리를 두르고 빛깔 고운 수술을 달아 화려하게 치장했다. 정재철은 그 작품을 블루모스크가 보이는 광장에 설치하고 사진을 찍었다.

3차 프로젝트는 2009년 1월부터 지난 4월 30일까지 진행됐다. 터키·그리스·세르비아·불가리아·헝가리·독일·이탈리아·프랑스 등을 거쳐 영국 런던에서 끝을 맺었다. 이번엔 아예 현수막으로 햇빛 가리개를 미리 만들고서 각 도시의 주요 지점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퍼포먼스를 벌였다.

7년간에 걸친 이 프로젝트를 결산하는 자리가 내달 16일까지 서울 평창동 김종영미술관에서 마련된다. 정재철은 김종영미술관의 '2011 오늘의 작가'로 선발됐다. 전시의 제목은 '실크로드 프로젝트'. 여행하며 찍은 사진과 동영상, 현지인들이 폐현수막을 이용해 만들었던 햇빛 가리개를 복제한 작품 20여점, 각국의 풍경을 그린 드로잉 등이 전시된다. 여행에 대한 작가의 총체적인 느낌은 독일서 가져온 플라스틱 맥주통과 나무합판을 이용해 만든 뗏목 작품으로 구현됐다.

구도(求道)하듯 진행된 이 오랜 여행을 통해 '조각가'에서 '전방위미술가'로 거듭난 정재철은 "'미술'과 '현실'과의 괴리감을 많이 느꼈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감상자의 생활 속으로 파고드는 미술'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했다. (02)3217-64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