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도 좋고 동지도 좋다… '바둑 男女' 새 바람

바둑판 앞에서 남과 여는 서로 적(敵)일까, 동지일까. 1대1 대결 때는 무조건 넘어야 할 대상이지만 단체 대결의 경우엔 얘기가 달라진다. 무대에 따라 적이 되기도, 동지가 되기도 하는 종목이 바둑이다.

성(性)이 주요 장치로 이용되는 2개의 바둑행사가 거의 동시에 시작돼 주목받고 있다. 남녀 성 대결장인 지지옥션배가 5기째를 맞아 23일 예선에 돌입하고, 남녀가 한 쌍을 이뤄 복식(複式)으로 싸우는 제1회 SG세계물산배 페어(pair) 최강전은 예선이 끝나 19일부터 본선의 막을 올린다.

실력만 따진다면 여성 바둑은 아직 남성에 비해 다소 처지는 게 사실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정규 기전서 여성이 우승한 기록은 제43기 국수전(2000년 루이나이웨이) 단 한 번뿐이었다. 세계 타이틀전서도 루이의 4강진입(92년 제2회 잉씨배)이 최고 기록이다. 양적으로도 국내 여성 프로(47명)는 전체(252명)의 18.6%에 불과하다.

고시(考試) 등 각 분야에 불어닥친 엄청난 여풍(女風)에 비춰볼 때 바둑계의 이 같은 현상은 잘 설명되지 않는다. '여건상 바둑을 접할 기회가 훨씬 적기 때문', '좌뇌가 발달한 여성들로선 태생적으로 불리한 분야'라는 등 여러 분석이 나오지만 시원한 해답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실력과는 별개로 반상(盤上)의 '남과 여'는 절묘하게 하모니를 엮어낸다. 양팀 12명 연승방식의 '성 대결장'인 지지옥션배의 경우 남자는 45세 이상, 여자는 무제한으로 양측 전력 불균형을 조절한다. 작년까지 4회를 치른 결과는 나란히 2대2. '최고 시청률' 프로그램에 '중간 결승'까지 겹치면서 올해 흥행 결과가 특히 주목된다.

페어대회로 눈을 돌리면 남녀는 타도 대상에서 함께 힘을 합쳐 싸우는 파트너로 변한다. 팀원 2명 중 1명을 아마추어로 채우는 것은 허용하되 반드시 혼성(混性)이어야 한다는 게 대회 규정이다. 개최 공고가 나가자 무려 56개 팀이 출전 신청을 했고, 예선을 거쳐 24팀으로 압축됐다.

상금(우승 3000만원)이 크긴 하지만 페어대회에 대한 이 같은 열기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다. 웬만한 중급 규모 대회는 외면해 오던 일인자 이세돌조차 광저우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이슬아와 팀을 짰다. 이상훈·하호정 등 부부조를 비롯해 사제조, 연인조, 동문조 등 다채로운 커플들이 대기 중이다. 처형(妻兄)·제부(弟夫)조까지 출전했다.

페어종목은 일본이 앞장선 세계선수권대회가 매년 열리고, 지난해 아시안게임 정식 종목에 포함되는 등 최근 몇 년 사이 국제적 붐을 맞고 있다. 이벤트용으로 태어났던 페어바둑이 주요 국제 경쟁 종목으로 떠오르자 한국기원 양재호 사무총장도 "페어바둑연맹 설립을 적극 검토할 생각"이라 밝히고 있다.

남녀가 같은 그라운드에서 함께 어울리는 종목은 스포츠에서도 매우 드물다. 차민수 四단은 "양성(兩性)이 동반자도 되고 성 대결도 치를 수 있는 특성을 살려 가면 흥행 메뉴가 훨씬 다채로워질 것"이라고 제안했다. 지지옥션배 돌풍의 주역이었던 그는 루이 九단과 한조를 이뤄 페어최강전에도 출전한다. 바둑판 위에서 절묘한 음양의 조화(調和)가 이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