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에 비친 ‘모던 조선’] [27] 주색잡기로 파산한 조선 귀족들 총독부에 손 벌려

"조선의 소위 귀족들은 대다수가 주색잡기로 가산을 탕진하고 비참한 광경에 빠지게 됨으로 당국은 그네들을 특별 우대하는 의미로 조선귀족세습재산령이라는 것을 발표하리라는데…."

1927년 2월 10일자 조선일보 기사다. 식민 통치의 협력자였던 조선 귀족들이 사치와 방종으로 파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귀족 재산 중 일정 부분의 매매를 제한해 강제세습시키겠다는 것이다. 총독부가 직접 나서 귀족들 재산 보호에 나서야 했을 만큼 귀족들의 방탕함은 도를 넘었다.

1910년 조선을 합병한 일본은 '조선귀족령'을 만들어 '조선인 유공자' 76명에게 작위를 줬다. 대부분 왕실의 종친과 대신들이었다. 이들 중 작위를 거부하거나 3·1운동 가담 등의 이유로 작위를 박탈당한 10여 명을 뺀 나머지 60여 명은 2만~50만원(약 4억~100억원)의 '은사공채(매국공채)'까지 덤으로 챙겨 거부(巨富)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축첩과 사치 등으로 파산하는 귀족이 속출했다. 이들은 총독부와 왕실 문턱이 닳도록 쫓아다니며 대책을 세워달라고 떼를 썼다.

"귀족 중에 가세의 곤란으로 체면을 손실할 만큼 되면 이왕직(李王職·일제 강점기 조선 왕실 사무를 집행하던 기구)에서 정리해 주기를 의뢰하는 이가 잇따르는 바, 가난한 귀족이 점점 늘어 일일이 정리해줄 수 없는 형편이므로 앞으로 그 같은 요구는 일체 거절할 방침이라더라."(1924년 4월 5일자)

나라 팔아먹을 때 이미 염치를 버린 귀족들은 왕실 재산인 창경궁까지 팔아먹을 궁리를 해냈다. "작년 봄에는 일부 귀족의 연서로 동경내각에 이왕직 소유인 창경원을 매각(140만원)하고 시내 황금정(을지로)의 귀족회관을 15만원에 매각해 곤궁한 귀족을 구해달라고 청원서를 제출"(1926년 8월 18일자)한 일도 있었다.

1928년 귀족 61명 중 40여 명이 파산 상태에 이르자 총독부는 '조선귀족구제안'을 들고 나왔다. 일본 정부에서 250만원(약 500억원)을 지원받아 그 이자로 귀족 생계비를 지급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일이 틀어졌다. 새로 출범한 내각이 신규 사업들을 전면 중지시키면서 조선귀족구제안도 보류됐다. 목이 빠져라 구제금을 기다리던 귀족들은 "매일 총독부를 찾아가 '다른 것은 중지하더라도 귀족구제안만은 실시해달라'고 맹렬히 운동"(1929년 7월 17일자)을 계속했다. 조선일보는 이 기사에 '수연(垂涎·탐이 나서 침을 질질 흘리는)하는 소위 귀족배/매일 총독부에 애원'이라는 조롱조의 제목을 달아 그 염치없음을 꾸짖었다.

그러나 총독부의 귀족구제안은 결국 시행됐다. "금월부터 구제를 받을 귀족은 전부 36명이요 급여할 금액은 매월 150원이라더라."(1929년 12월 13일자) 조선 귀족들이 비록 세상의 조롱거리로 전락했지만 일제로선 그들의 협력이 필요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