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 내 인생] 은행 본부장 관두고 갤러리 연강효주(61) 필립강갤러리 대표

"이제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것에 전념하고 싶구려."

2001년 어느 날 은행을 관두겠다고 말했을 때 아내는 덤덤했다. 느닷없이 튀어나온 객기가 아니라 오랫동안 정성을 쏟아온 결단임을 아내는 알고 있었기에 '드디어 올 게 왔구나'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당시 나는 하나은행 법인영업본부장이었다. 27년간 은행 생활을 하면서 주요 보직을 두루 거치며 출세가도를 달리던 내가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고 중도하차를 선언했다. 정년이 7년이나 남아 있던 시점이었다. 동료들은 다들 의아해했다. 직장 후배 하나는 울면서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그러나 미련 없이 떠났다. 인생이라는 산(山)의 7부 능선쯤에서, 나는 그렇게 전환을 맞았다.

나를 새로운 인생으로 인도한 것은 '그림'이었다. 학창시절부터 미술에 관심이 많았고 취직한 뒤로는 서울에서 하는 전시회는 죄다 봤다. A4 용지에 그즈음 하는 전시회와 화랑 목록을 빼곡히 적어 동선(動線)을 짜서 돌아다닐 정도였다. 평일에도 점심시간을 아껴 인사동의 화랑을 찾았다. 그림에 집중하기 위해 멀리한 것이 바둑, 낚시, 골프였다. 셋 다 시간을 많이 투자해야 하는 취미라서 손도 대지 않았다. 퇴직할 때 보니 지점장급 이상 직원 중에서 골프를 안 치는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도록(圖錄)과 잡지 같은 미술 관련 책자도 부지런히 사 모았다. 청계천 헌책방을 뒤져가며 미술 서적을 모조리 구입해 읽었다. 상여금을 탈 땐 미술 작품을 하나씩 샀다. 하나 둘 사모은 작품이 회사를 관둘 무렵 300점 정도 됐고 미술 서적은 사과 박스로 500상자 분량이 넘었다. 방대한 자료를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나자 미술 전문가들이 슬슬 나를 찾아왔다. 좀 더 전문적으로 미술을 연구해 보겠다는 생각에서 퇴직을 결심했다.

그렇다고 그림이 좋아서 무작정 관둔 건 아니다. 사실 30대에 접어들면서 퇴직 후 어떻게 살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얼추 일흔다섯까지 산다고 가정하고 인생을 25세, 50세, 75세까지로 나눴다. 25세까지는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공부하는 시기, 50세까지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일하며 사는 시기였다. 50세부터 75세까지 인생의 나머지 3분의 1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스스로 삶을 디자인하는 시기로 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은퇴 마지노선을 50세 전후로 잡았다. 하지만 이 퇴직은 '인생 퇴직'이 아니라 '직장 퇴직'이었다. 새 삶에 대한 대비가 필요했다. 내가 잘하는 것, 하고 싶은 것, 보람 있는 것을 생각해보니 오랜 취미인 미술이 떠올랐던 것이다.

퇴직을 한 뒤 그동안 모은 미술 자료를 갖고 '한국문화경제연구소'를 설립했다. 자연스레 만난 문화계 인사들은 독학으로 쌓은 나의 내공에 감탄하며 나를 '미술평론가'로 부르기 시작했다. 광운대 겸임교수로, 단국대 초빙교수로 대학에서 미술이론과 예술경영학을 강의하는 기회도 얻었다.

연구소를 꾸려가면서 이 일을 더 오래 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수입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2004년 6월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에 '필립강 갤러리'를 열었다. 필립(必立)은 대학 때 아버지께서 주신 아호(雅號)로, '반드시 성공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됐으니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성공의 절반은 이룬 게 아닐까 싶다.

대개 갤러리가 자리를 잡으려면 10년은 넘어야 한다고들 하는데 우리 갤러리는 꽤 빨리 안정을 찾았다. 그동안 갈고 닦은 안목을 충분히 담아 까다롭게 작품을 선정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얼마 전 신사동 도산공원 앞쪽으로 갤러리를 옮겼는데 조금씩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 같아 뿌듯하다. 아침 일찍 갤러리 문을 열고 새하얀 벽에 걸린 그림과 눈인사를 나누며 커피 한 잔을 마신다.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돌이켜보면 지금 이렇게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된 데는 일찍부터 체계적으로 준비한 것이 큰 도움이 된 듯하다. 제2의 인생을 살려면 전문성을 가져야 한다. 기원을 차리고 싶다면 적어도 아마 1단 수준의 바둑 실력은 갖춰야 하고, 당구장을 하려면 당구 200은 쳐야 손님을 불러들일 수 있다. 준비를 안 하면 실패한다는 얘기다. 열정을 쏟을 대상을 찾고, 실제로 그 일에 열정을 쏟는 것만큼 확실한 노후 준비는 없다. 누구든 언젠가 퇴직할 확률은 100%이고, 정년 이전에 퇴직할 확률 또한 거의 100%다. 퇴직은 생각보다 빨리, 그리고 갑자기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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