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1000점 기증 "세상 떠난 남편 뜻"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남편의 유지(遺志)를 따라 작품을 기증했습니다. '예술은 어느 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공유하고 나누는 것'이라는 것을 저도 깨달았거든요. 하늘나라에 있는 남편도 이 모습을 보고 흡족해하지 않을까요."

서울의 한 공업고등학교 교사이자 12번의 개인전을 연 작가 박경란(62)씨가 지난 전시회에 내놓았던 작품 1000여점을 해외원조단체 사단법인 봄에 20일 기증했다. 그는 "작품을 돈으로 따지지 않고 순수하게 활동했던 남편의 마음이 나에게도 전염된 것 같다"며 "작품이 좋은 뜻에 쓰이길 바란다"고 말했다.

박씨는 1976년 비구상화(추상화)로는 최초로 국전(國展)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박길웅 화백과 결혼했다. 박 화백은 한국 미술사에서 비구상화 시대의 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수많은 걸작을 남겼지만, 결혼 다음해에 37세로 요절했다. 박씨는 "남편은 전시할 때도 그림 옆에 '비매(非賣)'라는 딱지를 붙일 정도로 돈과는 관련 없는 사람이었다"며 "굶는 한이 있어도 항상 영국·프랑스제 고급 물감으로 그림을 그릴 정도로 순수 작가 정신이 뛰어났다"고 말했다.

박씨의 남편은 생전에 그림을 팔지 않았다. 예술은 누군가의 소유가 아니라 공유해야 한다는 소신 때문이었다. 생활비는 박씨가 교사로 일하며 벌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미술상들이 몰려왔다. 그림 한 장에 집 한 채 값을 불렀다. 주변 사람들도 시어머니와 첫돌 지난 딸을 돌보던 그에게 "그림 한 장 팔아 생활 좀 펴라"고 회유했다. 그러나 박씨는 남편의 유지를 꺾지 않았다. 오히려 남편의 주요 작품 80점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다. "남편을 이해하려고 잠시 놓았던 붓을 잡았어요. 작품은 돈이 아니라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들에 의해서 평가된다는 것을 깨달았죠. 예술은 누구의 소유가 아니라 함께 느끼고 나누는 것이라는 남편의 뜻도 이해하게 됐습니다."

박씨는 이후 교사로 일하며 작품활동을 계속했고, 지난 4월 말 12번째 개인전을 마쳤다. 그는 "그동안 전시회를 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작품을 만들었고 전시가 끝나면 거기에 담긴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가겠다는 사람들에게 하나씩 분양하듯 나눠줬다"고 말했다.

그가 기증한 1000여점의 작품 수익금은 사단법인 봄이 독일 해외 원조단체인 카리타스와 협력해 북한 어린이 원조와 중국 조선족 소학교 기숙사 건립사업에 쓰일 예정이다.

"비록 남편과 함께한 시간은 짧았지만, 그는 항상 제 마음과 무의식 속에 존재해요. 둘이 하나가 된다는 의미로 지정된 부부의 날에 하늘에 있는 그도 제 모습을 보며 '열심히 진실하게 노력하며 사는구나'하고 만족해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