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비주얼 특별기획] 전통, 21세기를 입다

등받이에 자개를 촘촘히 입힌 라운지 의자, 죽은 나뭇가지에 전통 매듭을 꽃송이처럼 붙여 만든 화분, 알루미늄을 레이저 커팅한 후 나전칠기를 입힌 다용도함….

전통 공예가 낡고 지루하다는 편견은 이제 그만 버려야 할 때다.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세련되고 모던한 이 작품들은 모두 전통 기법을 바탕으로 탄생했다. 전통 공예에 '현대'를 입히는 움직임이 부산하다. 옻칠과 나전칠기, 매듭 등 장인의 손맛에 현대적 디자인과 아이디어를 장착한 작품이 우리 전통 예술의 현대화·국제화 가능성을 활짝 열고 있다.

◆장인, 디자이너를 만나다

대표 주자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마영범(54). '디자인 과잉시대'의 돌파구를 전통 공예에서 찾고 있는 그는 장인들과 손잡고 디자인 프로젝트를 펼치고 있다. 지난해 진행한 '통영 12공방'과 설화문화전 '수작(手作)'은 베테랑 디자이너인 그가 고집스러운 장인들을 찾아가 하나하나 설득하고 또 설득해 만든 결과물이다.

가장 눈길 끄는 작품은 나전장(螺鈿匠) 김종량과 함께 만든 라운지 의자. 1950년대에 찰스 임스와 레이 임스 부부가 만들어 현대 디자인의 아이콘이 된 이 의자에 이순신 장군의 갑옷을 형상화한 자개를 촘촘히 입혔다. 각도에 따라 다르게 빛을 발하는 자개의 우아함이 감탄을 자아낸다. 대나무를 실처럼 가늘게 다듬어 만드는 통영대발을 평생 엮어온 염장(簾匠) 조대용은 광섬유와 대나무를 잇는 실험을 했고, 나전장 송방웅은 자개 원목 위에 레이저 커팅한 알루미늄을 입히는 파격을 시도했다.

마영범씨는 "지나치게 대량 생산되고 빨리 소비되는 이 시대의 디자인에 불만이 있다 보니 시간이 축적되고 사람의 손맛이 남아 있는 전통 공예에 닿게 됐다"며 "단지 전통 공예의 현대적 가능성을 확인하는 것을 넘어 실제 대중적 수요를 이끌어내는 것이 과제"라고 말했다.

◆다양한 아이디어도 활발

장인들 스스로도 다양한 변주를 시도 중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22호 매듭장 김희진은 한국의 전통 예술인 매듭에 '조명'을 결합했다. 원통형의 빛이 떨어지는 가운데 크고 작은 매듭이 매달려 있는 작품, 죽은 나뭇가지에 매화 매듭을 꽃송이처럼 이어 붙여 만든 화분은 실내 장식으로도 손색이 없다. 한국매듭연구회장 김혜순은 천연 섬유를 염색한 후 매듭을 이어붙이는 방식으로 추상적인 현대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해외에서도 인기

전통 공예의 우아한 아름다움은 해외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다. 일 년에 두 차례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세계 최대의 인테리어 박람회 '메종 오브제'에서 한국 전시관은 매년 인기다. 지난해 전시에서는 도예 작가 윤주철이 분청사기의 귀얄 기법을 응용해 만든 도자 작품을 보고 주문이 쇄도했다. 거친 귀얄붓으로 반복적으로 칠해 표면에 입체 효과를 낸 것이다. 전통 한지를 응용한 작품, 옻칠을 현대적으로 활용한 그릇과 찻잔 등에 유럽인들의 관심이 쏟아졌다.

지난 2000년부터 프랑스 파리 국제박람회에 전통 공예인들을 이끌고 참가하고 있는 이칠용 근대황실공예문화협회장은 "조선 여인들의 호신용 칼인 은장도가 프랑스에서는 소시지를 썰어 먹는 생활용품으로 인기를 끌었다"며 "올해는 대나무에 장식을 새긴 낙죽장도(烙竹粧刀)를 사려고 4시간이나 기다린 여성도 있었다. 옥기와 나전칠기, 한지 공예 등은 꾸준히 인기가 좋고 주문도 많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