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만 할 줄 아는게 서글퍼질 때도 있어"

황정민(41). 그는 참숯처럼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면서 오랜 시간 동안 지긋이 타들어가는 배우다. 2001년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로 이름을 알린 뒤 지난 10년간 '바람난 가족' '너는 내 운명' '여자, 정혜' '부당 거래' 등의 영화는 물론 뮤지컬, 연극, TV에도 꾸준히 출연했다. 그리고 작품의 성패와 별개로 그의 연기는 언제나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연기뿐 아니라 상을 받고 "스태프들이 차려놓은 밥상에 숟갈만 들었을 뿐"이라고 겸손한 인사말을 해 '인간성 좋은 배우' 타이틀까지 얻었다.

그가 이번에는 9일 개봉하는 박인제 감독의 장편데뷔작 '모비딕'에서 주인공인 열혈 사회부 기자 역을 맡았다. 한국 영화에서 오랜만에 보는 '음모론' 소재 작품이다. 1994년 신문사 사회부 기자 이방우(황정민)가 동료 기자 손진기(김상호), 성효관(김민희) 그리고 고향 후배 윤혁(진구)과 함께 서울 근교 발암교에서 일어난 의문의 폭발 사건을 추적하다가 국가의 미래를 좌지우지하는 의문의 일당과 맞선다는 것이다. 제목 모비딕은 이 음모를 꾸미는 의문의 일당이 사용하는 상징물이다.

31일 영화 시사회를 마치고 서울 동대문 시장 근처 한 극장에서 황정민을 만났다.

―기자 역할은 어떻게 준비했나.

"1990년대 초 사회부 평기자로 일했던 현역 신문사 데스크들을 많이 만났다. 함께 술을 자주 마시면서 그들의 무용담을 들었다. 편집국 안에서 담배를 어떻게 피웠었는지, 원고지에 기사를 쓰는 건 어떤지 사소한 것들까지 다 알아보면서 '이방우 기자' 캐릭터를 구축했다. 이방우는 사회부에 오기 전에 경제부나 산업부에서도 있었을 것 같고, 혼자 다니면서 특종잡는 것을 즐기는 기자인 것 같다."

―신문사 편집국의 인상은 어땠나.

"처음 방문했을 때가 오후 4시, 기사 마감시간이었다. 다들 말은 없는데 '나 건드리지 마'라고 하는 분위기였다. 생경하고 무서웠다."

―기자를 싫어하진 않나.

"배우들 입장에서 불편한 부분은 있다. 기사에 민감한 이들은 기자와 같이 얘기하다가 책잡히지 않을까, 기사화하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한다. 그런데 일단 컴퓨터에 서툴러서 나에 관한 기사나 댓글도 거의 안 본다."

―이방우 기자처럼 촌스럽고 우직한 역할로 이미지가 고정되는 느낌도 있다.

"지금까지 캐릭터를 보고 작품을 정한 적은 절대 없다. 중요한 건 이야기다. 시나리오 속에 담긴 이야기와 인물들의 삶이 재밌어야 캐릭터가 살아 숨 쉬는 거다. 모비딕의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너무 좋아서 다 읽기가 아까운 책'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두 시간 만에 읽고 바로 출연을 결정했다."

―앞으로 하고 싶은 작품은.

"여섯 살 된 우리 아이와 함께 볼 수 있는 영화를 찍고 싶다. 예를 들자면, 한국의 용사가 지구를 지키는 얘기 같은 거."

―최근 출연했던 TV 드라마 '그저 바라만 보다가'의 시청률이 부진했다. 그래도 TV는 또 하고 싶은가.

"하고 싶다. 매회 끝나고 시청자들의 반응이 있으니까 마치 연극 공연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잠자는 두세 시간 빼고 계속 촬영을 하니까 캐릭터에 아주 딱 붙어서 '연기'할 필요가 없어 좋았다. 잠 못 자는 거야 영화 촬영도 마찬가지니까 별로 안 힘들다."

―캐릭터에 딱 붙어살면 작품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오기 힘들지 않나.

"작품이 끝나면 하얗게 잊어버리는 편이다.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 영화 '그림자 살인'의 연기다. 그전까지는 연기를 잘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옥죄다가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나를 믿고 풀어놨다. 그 이후로 한 발짝 물러나서 연기를 볼 수 있게 됐다."

―'와이키키 브라더스' 이후 10여년간 활동을 쉰 적이 거의 없다. 에너지가 소모, 또는 고갈된다는 느낌은 없나.

"우선 배우가 직업이기 때문에 관객들과 계속 만나고 소통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낀다. 무대 위에, 카메라 앞에 안 서는데 어떻게 배우인가. 그리고 사람도 배우도 계속 변해야 한다. 데뷔 이후 30대 때 정말 치열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40대가 돼서 연기에 대한 관념이나 개념 같은 것도 생기는 것 같다. 그리고 나름 잘 쉬고 있다. 석 달 작품 하고 석 달 쉬는 식이다."

―50대, 60대의 배우 황정민은.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 나온 잭 니콜슨처럼 잘 늙어서 60대에 로맨스영화를 찍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배우 말고 다른 일을 하고 싶지는 않나. 예를 들면 기자는 어떤가.

"하고 싶은 거 많다. 배우로서 인생을 마감하는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40대에 들어선 이후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연기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조금 서글프다. 원래 미술을 좋아해서 그림에도 관심이 가고 무대미술을 공부한 적이 있어서 한옥도 지어보고 싶다. 악기도 배운다. 그래도 기자는…. 독수리가 어린 아이의 머리를 쪼으려고 하는 모습의 사진 보도를 봤다. 사진기자가 사진을 찍고난 뒤 아이를 구하고서도 나중에 아이보다 사진을 먼저 생각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다 결국 자살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처럼 기자의 본분과 '사람'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있을 텐데 그런 상황을 마주하는 게 싫다."

―악기는 무엇을 배우나.

"부끄러워서 얘기 안 해줄거다. 잘하게 되면 나중에 보여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