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슴 흔든 노병들 증언 담았다"

1950년 8월 20일 홍콩 주둔 영국군 27여단 장교들이 고급 클럽에서 파티를 열었다. 흥겹게 술잔을 부딪치는데 본국에서 전화가 왔다. 전화받고 온 장교가 보고했다. "곧바로 한국으로 이동하라는데요." 좌중에서 한국이 어딘지 아는 사람은 우표를 수집하는 장교 한 명뿐이었다. 나머지는 얼떨떨했다. 누군가 물었다. "한국에서도 운동할 기회가 많을까요? 골프채를 가져가야 할지 고민되네요." 상급자가 답했다. "말이라고 하나? 당연히 가져가야지." 그들은 상황이 얼마나 급박한지 몰랐다. 6·25가 터진 뒤 삽시간에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간 한미 연합군은 "도와달라"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영국 켄트대와 런던대를 졸업하고 13년째 한국을 취재해온 앤드류 새먼(Salmon·45) 더타임스지 서울특파원이 6·25 전쟁을 다룬 책 '검은 눈(雪)이 내린 땅(Scorched Earth, Black Snow)' 영문판을 런던에서 냈다. 2년간 영국·호주·미국·한국의 참전용사 90명을 인터뷰한 결과이자, 2009년 펴낸 전작 '마지막 한발(To the Last Round)'에 이어 6·25의 속살을 파고든 두 번째 책이다.

전작이 1·4 후퇴 이후를 다루고 있다면 이번 책은 전쟁 발발 직후부터 1·4 후퇴 직전까지를 영국군 27여단 중심으로 풀어간다. 27여단은 미군을 제외하면 가장 먼저 한국 땅을 밟은 유엔군이다. 이동 명령 일주일 만에 휘파람 불며 부산항에 내린 그들은 미군과 함께 낙동강과 한강을 넘어 북진해갔다. 그 길 끝에 227만 중공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새먼씨는 1일 서울 영국대사관에서 국내외 기자들과 만나 "네 가지 이유에서 6·25는 대단히 중요한 전쟁"이라고 했다. 첫째, 중국은 아편전쟁·중일전쟁·국공내전을 거치며 국제적 발언권이 약화됐다가 6·25 참전을 계기로 '군사 수퍼파워'로 거듭났다. 둘째, 북한의 유례없는 이념적 순혈주의를 설명해준다. 새먼씨는 "1·4 후퇴 때 북한 민간인 중 공산주의에 찬동하지 않는 세력은 거의 모두 피란길에 올라, 김일성은 진공 상태에서 왕국을 세울 수 있었다"고 했다. 셋째, 수많은 통일 방식 가운데 최소한 한국이 주도하는 군사적 북진통일의 길은 영영 닫혔다. 넷째, 6·25 때 고전한 미국은 이후 북한에 군사적 응징을 꺼리게 됐다.

새먼씨는 "그런데 솔직히 내가 책을 쓴 이유는 이 네 가지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했다. 그를 끌어당긴 건 인간의 비극과 투혼이었다. 그는 노병(老兵)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61년 전의 전장을 손에 잡힐 듯 복원해냈다. 새먼씨는 "취재하면서 병사들의 용기에 숙연해진 때가 많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