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 내 인생] 농부·밥집 주인에서 바리스타가 된 임송자(68)씨

서울 지하철 3호선 정발산역에 '실버데이'라는 커피가게가 있어요. 비가 오나 땡볕이 쬐나 오후 2시부터 5시 30분까지 빨간 모자를 쓰고 커피 내리는 '할머니 바리스타'가 바로 접니다. 경력 3년차이고, 하루 종일 번갈아 가게를 지키는 바리스타 4명 가운데 가장 고참이에요.

커피향 구수한 카페모카, 다방 커피처럼 달콤한 연유라테, 다섯 가지 생과일주스, 들고 다니며 먹기 좋은 컵빙수 등 28가지 메뉴를 쉴 새 없이 정확하게 만들어 냅니다. 커피 내리랴, 과일 깎으랴, 10여 가지 소다수와 파우더와 시럽을 정확하게 재고 섞고 휘저으랴…. 손님이 몰릴 땐 손발이 잠시도 쉴 새가 없어요.

와중에 수다도 떨고 농담도 합니다. 아들 같은 회사원이 "캐러멜 마키아토를 참 예쁘게 잘 만드신다"고 칭찬하자 얼른 화답했지요. "잘생긴 손님이 시키니까 겁나게 이쁘게 만들어 부렀어요."

고향이 전남 해남이에요. 할아버지가 큰 고깃배를 가진 선주(船主)였지요. 농사는 으레 머슴이 짓는 줄 알았어요. 두 다리 쭉 뻗고 책 읽다가 숙모님에게 야단맞곤 했지요. "워따, 가시나야! 긴 다리 쭉 뻗고 책 읽으면 쌀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

자라면서 시나브로 집안이 기울었어요. 맨 먼저 아버지가 6·25 전쟁 때 공산당 피해 숨어다니다 돌아가셨어요. 이어 할아버지·숙부·어머니가 차례로 돌아가시니 그 많던 재산이 자취 없이 사라지데요.

1965년 스물세 살 때 인근에 사는 5남매의 장남에게 시집갔어요. 농토라곤 달랑 논 다섯 마지기였어요. 그나마 두 마지기는 남의 집 밭두둑 밑에 붙은 계단식 논이고, 나머지 세 마지기는 집에서 3㎞ 떨어진 산골짝에 있었어요. 먹고 살자면 농사를 지어야겠는데 일을 할 줄 모르니 막막했지요. 남편은 봄 한철 쟁기질 거들고는 내내 낮잠만 잤어요. 나 혼자 보리를 심으러 갔다가 어떻게 밭고랑을 내는지 몰라 밭둑에 앉아 펑펑 울었어요. 품앗이 다니며 억척스레 일을 배워 삼남매를 길렀지요.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니 욕심이 생겼어요. 1986년 아이들을 서울 학교에 보낼 욕심으로 온 가족이 상경했어요. 서울 영등포구에 방 두 칸짜리 전셋집을 얻었지요. 아이들 학비 벌려고 봉제공장에 취직했다가 두 달 만에 쓰러졌어요. 공기 맑은 시골에서 밭 갈다가 온종일 공장에 갇혀 있으니 죽겠더라고요.

고민 끝에 가사도우미 사무실에 찾아갔어요. 가기 전에 갈등했지요. 시골에서 '아가씨' 소리 듣고 컸는데 남의 집 일하려니 자존심 상했거든요. 하지만 마음을 달리 먹었지요. 나는 '엄마'잖아요. 사무실에서 주는 일을 하루 네 탕씩 뛰었어요. 새벽 4시부터 청소 아르바이트하고, 오전 9시부터 오후 늦게까지 가사도우미로 두 집을 돌고, 횟집에 가서 밤 11시까지 설거지를 했어요.

1991년 경기도 고양시에 7000만원짜리 아파트를 분양받았고, 근처 공단에 밥집을 차렸어요. 장사 잘 됐어요. 비결? 따로 없어요. 밥 많이 줘서 망하는 밥집 못 봤어요. 인심 좋다고 소문나면 그게 이익이지요. 그래도 IMF 때는 휘청했어요. 우리 식당에서 밥 먹는 공장이 여러 곳 부도났거든요. 거래처 사장이 "공장이 문 닫아서 밀린 밥값 못 드린다"고 했어요. 속상했지요. 그래도 젊은 사람이 안돼 보여 "밥이나 먹고 가라"고 붙들었어요. 김치찌개 끓여주고 다방커피도 타줬어요. 그 사람이 몇 년 뒤 불쑥 찾아와 180만원을 내밉디다.

2005년 초에 이만하면 먹고살 만하다 싶어 식당을 정리했어요. 큰딸(46)은 유치원 하고, 둘째딸(44)은 꽃 도매상 하고, 막내 아들(40)은 번듯한 회사 총무과장이 됐어요. 무뚝뚝한 남편이 불쑥 한마디했어요. "자네, 나 만나서 고생 많이 했네." 그해 여름 남편이 지병으로 세상을 떴어요.

나도 이듬해 딸들 성화에 건강검진받으러 갔다가 대장암 수술을 받았어요. 초기에 발견해 완치됐지만 느낀 바가 많았어요. 쓸쓸했거든요. 나는 이제 젊은 시절처럼 절박하게 돈 벌 필요는 없어요. 그러나 나이 먹어도 일은 있어야겠구나 싶었어요.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배워 활기차게 즐기기로 했어요. 2008년 집 근처 덕양노인종합복지관에서 3개월 과정을 마치고 바리스타가 됐어요. 복지관 구내 커피가게에서 일하다 실력을 인정받아 정발산역 지점으로 옮겼어요.

힘드냐고요? 재미있어요. 바리스타가 안 됐으면 어디 가서 젊은이들과 어울리겠어요? 얼마 전 제대하고 복학한 맏손자(24)가 "교수님이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 '외할머니'라고 대답했다"고 해요. 아주 흐뭇했지요. 외국인? 두렵지 않아요. "투 샷?" 이러면 다 알아듣더라고요. "진하게 내려드릴까" 하는 뜻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