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튀니 더 튀네

요즘 한국 도심의 풍경을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건축물 중 하나가 패션·뷰티 브랜드의 매장들이다. 매장이 단순히 물건을 파는 공간을 넘어 그 브랜드의 철학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무대로 진화하면서 예술 같은 건축물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각 브랜드에서 경쟁적으로 매장 건축물과 내부 디자인에 세심한 신경을 쓰면서 건축적인 완성도가 높은 건물이 많이 생겨났다. 이 같은 흐름이 시작된 2000년대 초반 매장 건축물이 독특한 형태의 명품 플래그십 위주였다면 최근엔 주변 환경과의 조화를 고려한 건축물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2007년 서울 강남구 신사동 도산공원 근처에 등장한 패션 브랜드 '앤 드뮐미스터'의 매장 건물은 이런 트렌드를 알리는 신호탄과 같았다. 벽면이 온통 초록빛 잔디로 뒤덮인 건물은 그동안 금속의 번쩍번쩍한 외벽을 주로 썼던 매장과는 대비되는 건축물이었다. 건축가 조민석씨가 설계한 이 건물이 나오자 미국 뉴욕타임스는 '도쿄는 잊고 서울을 보라'고 쓰기도 했다. 이후 강렬한 색채나 형태의 외벽 대신 은은한 디자인을 입은 건물들이 줄을 잇기 시작했다.

◆무조건 튀지 않는다

과거엔 브랜드의 로고나 상징 색으로 건물 외벽을 장식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요즘은 흰색이나 나무색 등 자연스러운 색상의 소재를 사용하는 건물이 많아졌다. 장식적인 요소도 배제하는 분위기다.

지난 4월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들어선 폴 스미스 단독 매장 건물. 건물 앞에 작게 서 있는 '폴 스미스(Paul Smith)' 간판이 없다면 패션 매장인지 모르고 지나치기 십상이다. 장식이라곤 거의 없는 이 흰색 건물은 거대한 풍선껌 혹은 마시멜로처럼 생겼다. 건물 전체가 곡선으로 이뤄진 탓에 앞면과 뒷면·옆면 모양이 모두 다르게 보인다. 대단히 독특하지만 '악' 소리 나게 튀는 요소도 별로 없다. 보면 볼수록 깜찍하지만 오래 봐도 질리지 않는 디자인이다.

이 건물을 만든 건축가 홍택·김찬중(건축설계사무소 '시스템랩' 공동 대표)씨는 "보는 이에게 해석의 여지를 줄 수 있는 건축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이들은 "무조건 화려하게 튀는 것보단 환경과 어우러지면서도 개성을 잃지 않는 건물을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사람을 압도하는 기하학적인 모양이나 번쩍번쩍한 마감재를 택하지 않고도 개성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오히려 '조화'와 '여백의 미'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얘기다.

화장품 브랜드 SK2가 지난 3월 강남구 신사동 도산공원 근처에 문을 연 '부띠끄 스파' 건물도 비슷한 사례. 이영조 BP 대표가 설계한 이 매장은 여러 개의 화장품 병을 모아놓은 듯한 사각 건물이다. 조명을 절제해서 쓴 덕에 낮에도 밤에도 웅장하기보단 은은한 빛으로 빛난다. 이 회사 디자인 매니저 박연정 과장은 "오래 봐도 질리지 않고, 그러면서도 제품 이미지를 잘 보여줄 수 있는 매장 건물을 지향했다"고 했다.

◆자연 소재 많아져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문을 연 화장품 매장 '더샘'도 주변 환경과의 조화를 따져 만든 가게다. 지붕 낮은 한옥이 많은 삼청동의 지역 특색을 고려해 으리으리한 대리석이나 LED로 입구를 장식하는 대신 외관을 원목으로 장식해 한옥 느낌을 냈다. 드라마 '궁'에서 의상을 담당했던 한복디자이너 배영진씨가 전체 디자인을 총괄 담당했다.

신사동 가로수길 '캠퍼(Camper)' 매장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매장 인테리어보단 세련되면서도 작은 웃음을 주기 위한 세세한 부분에 신경을 썼다. 장식대로 쓰이는 매장 가구엔 모두 작은 바퀴를 달아 세발자전거를 연상시키도록 했고, 곳곳엔 자동차나 자전거를 연상시키는 작은 부품과 장식을 배치했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세계적인 리빙디자이너 알프레도 하베를리가 직접 디자인한 매장이다. 캠퍼측은 "손님들이 매장에 들어오면 바로 새 신을 신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을 느끼도록 신경 썼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