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그림으로 제 맛 살린 흑백TV 시절의 추억

2011년은 한국 애니메이션의 꿈이 실현되는 해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제작사 '연필로 명상하기'가 10년간 준비한 장편 애니메이션 '소중한 날의 꿈'을 비롯해 한국 애니메이터 고유의 솜씨와 감성이 담긴 애니메이션들이 줄줄이 개봉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껏 국내에서 만든 극장 개봉용 애니메이션이 성공한 선례가 없기 때문에 이들에게 거는 기대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지난주 '소중한 날의 꿈'의 안재훈 감독을 서울 대학로에 있는 그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작업실 벽에는 '치유의 힘이 있는 그림, 감동이 있는 색깔'이라고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다.

―컴퓨터로 만드는 3D 애니메이션이 대세인 가운데 '소중한 날의 꿈'은 요즘 보기 드문 2D 셀 애니메이션(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는 애니메이션)이다.

"'소중한 날의 꿈'은 우리 제작사가 만든 첫 창작 장편이다. 우리에겐 진정한 의미에서 (창작의) 시작이기 때문에 모든 게 사람의 손에서 나와야 했다. 그게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표현 방식이기도 하다. 그림 그리는 사람이니까 3D가 욕심 나기도 하지만 현실을 안다. 그건 노력이나 진심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적 가치의 문제이기 때문에 나보다 훨씬 담이 큰 사람이 해야 한다."

―작업 기간이 무려 10년이다. 왜 그렇게 오래 걸렸나.

"제작비를 구해야 했기 때문에 '소중한 날의 꿈' 하나에만 매달릴 수 없었다. 다른 일을 병행하면서 작업을 하다 보니 그만큼 시간이 오래 걸렸다."

―수입문제는 애니메이터들의 공통적인 고민일 듯싶다. 생활을 위해서는 어떤 일을 하는지.

"2002년부터 이번 작품을 만들었는데 그전에는 미국이나 일본 애니메이션의 OEM 작업으로 수입이 있었고 단편 애니메이션 작업도 했다. 이번 영화를 만들기로 하면서 해외 OEM은 2002년부터 중단했다. 지난 10년 '소중한 날의 꿈'을 만들면서 아동용 만화 등 국내 애니메이션 작업을 같이해 수입을 얻었다."

―아내인 한혜진씨가 공동 감독이다.

"아내는 한국에서 가장 타고난 재능을 가진 애니메이터다. (살리에리가 그랬던 것처럼) 모차르트와 함께 일하는 기쁨과 슬픔을 모두 느끼고 있다."

―등장인물 중 누구와 가장 닮았나.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써온 일기와 메모를 토대로 스토리를 만들었기 때문에 모든 등장인물에 내가 다 조금씩 들어 있다. 주인공 이랑이 진지하게 고민하면서도 눈 감으면 철수 생각을 하는 것처럼 그 무렵에 쓴 일기도 나라에 대한 충성과 고민으로 시작했다가 여자 얘기로 끝이 나는 게 많다. 수민이 쓴 시도 내가 예전에 쓴 시다."

―시대적 배경은.

"컬러TV가 나오는 1981년 직전이다. 어른들이 애니메이션을 '애들 얘기'로 받아들이지 않게 하려면 그들 얘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른 관객은 영화를 보면서 1980년대 초반 당시 흑백TV로만 봤던 장면들을 컬러로 봤을 때의 환상적 경험을 되살릴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지금껏 놓쳤던 풍경을 되돌려 담아내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김만수의 '푸른 시절' 등 1980~90년대 히트 대중가요를 삽입했던데.

"힘들 때 가장 힘 된 게 한국 대중가요고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된 노래도 김동환의 '소중한 날들의 기억'이다."

―엔딩 크레디트에 청각장애인인 철수의 삼촌이 나와 수화를 한다. 무슨 내용인가.

"'나중에 어른이 돼서 무언가를 선택하려는 순간 꿈 때문에 고민하고 울던 어렸을 때를 떠올려라. 이왕이면 네 꿈을 웃으면서 응원하라'는 내용이다."

―애니메이터로 사는 게 힘들지 않나.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고 글 쓰는 걸 너무 좋아해서 이 둘을 하며 살 수 있는 내 직업이 좋다. 스스로 내 직업에 희망이 없다는 생각은 많이 든다. 그럼에도 여러 사람의 노력으로 그걸 바꿔봐야 하지 않겠나. 이번 애니메이션이 이 일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