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특별기획] "8박9일간 사투 끝에 우린 끝내 고지 지켰다오"

"우리는 그곳을 사지(death place)라고 불렀어요. 해리고지에서는 안전한 곳이 없었다오."

6·25전쟁 막바지인 1953년 6월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강산리 '해리고지' 전투에 참전했던 미군 노병 데이비드 밀스(79)씨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당시를 떠올렸다. 아직 정정한 그는 9일간 계속된 가장 치열했던 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끈 영웅 중 한 명이다.

◆참전 노병들의 특별한 만남

밀스씨를 비롯한 영웅 20여명이 지난 11일 미국 조지아주 사바나시 한 호텔에 천천히 들어섰다. 처절했던 고지 쟁탈전에서 살아남은 미 참전용사들이 해리고지 사수 58주년을 기념해 미국 각지로부터 모여든 것이다.

세월의 풍상은 어쩔 수 없는 듯 고지를 뛰어 오르내리던 날랬던 그 발걸음이 아니었다. 철모 속 빼곡했던 머리칼은 성겨졌거나 서리가 내린 채였다. 해리고지생존자연합회 회원은 현재 160명쯤 되고 "우리가 지켜냈다(We Held)"는 구호 아래 모임을 갖는다.

이들은 올해로 20년째인 해리고지 전투 기념식 및 전사자 추모식을 조촐히 치렀다. 노신사 20여명은 성조기와 태극기를 펴들고 전사한 동료들과 한국군 카투사의 명단을 펴놓고 그 앞에 촛불을 켜 영혼을 달랬다.

"제일 힘든 고통은 어제까진 정담을 나눴던 동료들이 밤사이 싸늘한 시신으로 변해 있는 걸 내 눈으로 보는 것이오. 작별 인사도, 포옹도 나누지 못했고 눈물도 나오지 않았지요. 하지만 우리는 마침내 고지를 지켜냈습니다. 우리는 영웅입니다." 존 페라라(80)씨의 떨리는 목소리에 참전용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군목(軍牧)으로 참전했던 에드 한라한 목사는 "한국은 이제 더 이상 잿더미의 나라가 아닙니다. "오늘의 한국은 우리의 고귀한 희생 위에 한국인의 위대한 노력이 더해진 결과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 카투사의 용맹을 잊을 수 없어요"라고 말했다. "언어 장벽이 있었지만 그들의 조국애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한·미동맹은 6·25 당시 우리 같은 병사들이 만든 것이라오."

3년 전 찾아온 뇌졸중으로 몸이 불편한 레너드 라소(81)씨는 "죽기 전에 꼭 한 번이라도 서울과 철원을 가보고 싶다"며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주소를 적어 줬다.

◆미망인, 57년 만에 남편 체취 찾아

"비무장지대(DMZ) 철책에 헌화한 사람은 우리가 처음이겠죠?" 지난해 11월 미국인 플로렌스 브래들리(76) 여사는 결혼식 1년 만에 한국의 전장(戰場)에서 실종돼 58년째 답이 없는 임의 체취를 향해 남방한계선 철조망에 꽃을 꽂았다. 가을 하늘은 서럽도록 푸른데, 미망인은 체념이 쌓여선지 담담했다. 유복녀(遺腹女)인 딸 론다 맥컬리프(58)씨는 엄마 곁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모녀는 처음 한국을 찾아 해리고지가 바라보이는 철원 청성전망대(OP)를 찾았다. 1953년 6월 11일 그 고지에서 로널드 브래들리(Bradley· 당시 21세) 일병은 실종됐다.

"아버지가 실종된 지 67일 만에 태어났어요. 부친은 '어머니 날'에 주변 모든 어머니들에게 꽃을 건네 줄 정도로 사려 깊은 분이라고 들었어요." 딸 론다는 때론 신이 나서, 때론 눈물을 흘려가며 그동안 전해 들은 아버지 얘기를 이어갔다. "사춘기 소녀 적엔 얼굴도 보여주지 않은 채 떠나가신 부친을 원망했죠."

브래들리 부부는 주민 300명이 어울려 사는 미 네브래스카주 소읍에서 자란 이웃이었다. 남편 집안은 농사를 지었고, 아내 집안은 식료품점을 운영했다. 둘은 1952년 6월 마을 교회에서 결혼했고, 남편이 징병되자 아내는 조금이라도 오래 곁에 있으려고 캘리포니아 신병 훈련소까지 쫓아가 침구 정리와 청소 일을 했다. 브래들리 일병은 1953년 4월 1일 한국 땅을 처음 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