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삼계탕 기다려지는 여름

서울에 산 지 3년이 지난 지금, 이 도시는 여전히 매혹적이다. 익숙해졌다 싶은 거리가 갑자기 새롭게 바뀌는 일이 다반사다. 인사동에서는 어제까지 갤러리였던 곳이 오늘은 커피숍으로 바뀌고, 삼청동에서는 그 반대다. 쉴 새 없이 변하는 도시, 그게 서울의 매력이다. 이런 역동성이 도시 전체로 전염되면서 도시인들에게 에너지를 주는 것 같다.

바뀌는 것만 있는 건 아니다. 가회동, 노량진 등 오랜 전통을 지닌 마을은 또 다른 매력이 있다. 가회동 언덕배기에 살다보면 좁은 골목 사이사이로 전통 한옥부터 현대적 빌딩까지 다양한 건축물이 공존하는 풍경을 볼 수 있다. 아내와 산책을 나서면 반갑게 한국말로 인사하는 구멍가게 아주머니, 세탁소 아저씨, 정육점 주인, 빵집 사장을 만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친구'다. 언어가 달라 대화하는 데 애를 먹지만 소통에는 지장이 없다. 만국 공통어인 손짓 발짓으로 우리는 정(情)을 통한다.

쇠고기를 사러 가서 명칭은 몰라도 특정 부위를 손가락으로 가리킨 뒤 "얼마예요?" 하고 물어보면 '거래 끝'이다. 정육점 주인도 환한 웃음과 함께 역시 손가락으로 가격을 매긴 숫자를 가리키며 한국말로 값을 알려준다. 못 알아들어도 돈을 내고 거스름돈을 받은 뒤 반갑게 손을 흔들고 나온다. 이방인에게 베푸는 친절은 아마 한국인들이 가진 품성이 아닐까 싶다.

삼청공원은 도심 속 오아시스다. 여기서 청와대 뒤쪽 북악산 정상까지 오르는 게 가회동 생활의 즐거움 중 하나다. 정상에서 눈 앞에 끝없이 펼쳐지는 서울 전경(全景)의 파노라마 같은 경치를 보고 있노라면 말을 걸어오는 등산객이 적지 않다. "저쪽으로 가면 더 좋은 숲이 나온다"든지 "도봉산도 한번 가보라"든지, 이것저것 조언해 주고 흥미로운 곳을 알려준다. 그러다 보면 산 위에서 자연스레 명함을 주고받기도 한다. 업무상 아는 것도 아니고 뭔가 높은 지위에 있을 것 같은 사람도 아니다. 그냥 산에서 만난, 흔히 보는 서울 사람들이다. 처음엔 명함이 없어 받기만 하다가 이젠 등산 갈 때 꼭 명함을 챙긴다. 가끔 명함을 주고받은 사람들이 이메일로 "요즘도 산에 자주 가냐"며 안부를 묻곤 한다. 기억나지도 않는데 같이 찍은 사진을 보내주는 사람도 있다. 크리스마스나 연말에 e카드를 보낸 산(山) 동무도 있다. 이런 게 '인연'일까. 한국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더니 그 말이 실감났다.

노량진 수산시장은 정겹다. 세련되지는 않지만 말로 설명 못 할 흥겨움이 넘쳐난다. 단골인 황제식당 주인은 갈 때마다 "어젯밤에 사장님이 여기 오는 꿈을 꿨어요" 하며 반갑게 맞는다. 믿기 어렵지만 기분은 좋다. "사장님께 드리려고 특별히 감춰 둔 생선"이라며 회를 떠준다. 이 또한 잘 믿기지 않지만 기분이 더 좋아진다.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방으로 따로 들어가 회를 먹는 건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 주인은 그런 내 기분을 아는지 항상 북적거리는 홀로 안내한다. 파란 눈의 외국인이 파전과 매운탕에 생선회를 우걱우걱 입에 집어넣는 모습을 주위에 있는 한국인들이 휘둥그레 바라볼 때가 많다. 얼큰해지면 누군가 서투른 영어로 말을 걸어온다.

그들은 항상 "한국 음식 좋아하세요?"라고 묻는다. 대답은 물론 "좋아합니다"이다. 그럼 또 "맵지 않냐"고 묻는다. 그럴 때 비장해 둔 대답이 나온다. "김치찌개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 음식입니다." 사실 처음 김치찌개를 맛보았을 때 느낌은 '이 맵고 이상한 수프는 뭐지?'였다. 하지만 몇 번 먹다 보니 금세 익숙해져 버렸다. 이제는 영국에 사는 아들과 딸이 놀러 오면 첫 식사는 김치찌개를 곁들인다. 아들딸에게 꼭 소개하고 싶은 한국 음식이기 때문이다.

사계절이 뚜렷한 서울은 각 계절을 열렬히 기념이라도 하는 듯하다. 봄에는 남산과 여의도에 벚꽃이 피고, 딸기가 탐스럽게 진열된 과일상이 곳곳에 있다. 석가탄신일 기념 연등제 때 종로를 지나는 행렬은 장관이다. 따뜻한 햇살을 쬐며 한강시민공원을 거닐고, 도시 생태계 복원 사례로는 세계 최고인 청계천을 즐기는 일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은행잎이 노랗게 물든 가을이 오면 경복궁이나 창경궁을 거닌다. 겨울이 되면 압구정동 쇼핑가에서 선물을 고르고, 가로수길 카페에서 점심을 먹는다. 광화문광장에서 스케이트를 탈 수도 있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이면 제주도에서 노란 한라봉이 나오며 다시 봄이 왔음을 알린다.

이제 곧 여름이다. 여름은 무엇보다 삼계탕의 계절이다. 내 고향 영국에는 없는 음식이지만 삼계탕을 맛보는 게 내가 여름을 기다리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