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에 비친 '모던 조선'] [37] 장안 기생 총출동 "경성악대 살리자" 공연… 종로는 인산인해

1921년 3월 14일 오후 7시, 서울 종로 수은동 단성사 앞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경성의 미녀 기생들이 총출동한 공연 때문이었다. 조선일보는 3월 16일자 사회면 머리기사로 다음과 같이 전했다.

"…경성 미인계에서 가장 오랜 력사를 가진 김춘외춘(金春外春)이를 필두로 하야 왕월출(王月出) 홍소월(洪소月)… 신채선(申彩仙) 서산호주(徐珊瑚珠)…등, 어린 기생들이 요요한 허리를 죄이여 활발한 군악에 마추어 추는 팔검무는 '잘한다' 쇼리가 끈치지 안엇스며… 만장의 갈채를 받았다."

서울시내 한성·대정·대동·한남·경화 5개 권번(기생조합)이 함께 모여 공연을 펼친 것은 해산될 운명에 처한 '경성악대(京城樂隊)'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기생들은 이날 의연금 기부에도 앞장섰다. 대정 김금랑, 대동 고산옥이 각 20원, 한성 최금홍과 백소춘 강연월, 대정 권경란 김도화가 각 10원씩을 냈다. 이는 당시 장안의 신흥 부자로 떠오르던 단성사 주인 박승필(10원), 요리점 유일관 한규식, 구둣방 화평양화점 김덕인, 통의동 포목상 채인석(이상 5원) 등 보다 더 '통 큰' 금액이었다.

이에 앞서 3월 13일자 조선일보는 '만천하 동포여, 동정하라 경성악대에'란 제목의 기사를 싣고, 경성악대의 연혁과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기사에 따르면, 경성악대는 대한제국 시절인 1901년 '보로서(普魯西/프러시아)' 사람 에케르트(Eckert)를 영입하여 창설한 군악대의 후신. 100여명으로 구성된 군악대는 1907년 8월 조선 군대가 해산되면서 해체된 뒤 '장례원 음악대' '이왕직 양악대(洋樂隊)'란 이름으로 축소 운영되어 오다가, 그나마 1915년 재정 악화로 해산됐다. 에케르트의 통역으로 일하다 클라리넷을 배우고 군악대원이 됐던 백우용(白禹鏞)이 조선 유일의 양악대가 사라진 것을 안타깝게 여겨, 1919년 20여명의 단원을 모아 '경성악대'를 만들어 양악을 보전해 오던 터였다. 그러다 재정난에 처하자 "조선에 처음으로 서양 음악을 소개한 경성악대를 우리가 아니면 뉘라 동정하랴"는 호소에, 장안의 기생들이 발 벗고 나선 것이다.

사흘 동안 이어진 공연은 '본사 후원 경성악대의 연주대회는 금일'(3월 14일자), '경성악대 연주 초일의 대성황'(3월 16일자),'연주대회 제2일 공전절후(空前絶後)의 성황'(3월 17일자), '경성악대 연주는 무전(無前)성황으로 종료'(3월 18일자) 등의 제목으로, 연주회 내내 연일 조선일보 사회면 머리기사로 장식됐다.

장충단이나 사직공원, 창경원 등에서 열린 경성악대의 연주회는 당시 서양 음악을 접할 기회가 전무했던 일반인들에게 서양의 독창이나 합창, 관현악 연주 등을 들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였다. 조선에서 양악의 명맥을 근근이 유지하던 경성악대는 1930년경 해체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