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0명이 곧 12만명으로… 反폭압 봇물 터지자 누구도 못 막아"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작습니다. 그 일은 한여름 태양에 뜨겁게 달궈진 바위 위에 떨어진 물 한 방울처럼 덧없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희망의 증거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한국 개신교 인사들과 대학생, 탈북자 등 30여명의 한국 손님을 맞은 지난달 말, 크리스티안 퓌러(68) 목사는 교회의 힘이 그리 크지 않다고 겸손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22년 전, 구 동독에서 시작한 '월요평화기도회'가 결국 동독의 붕괴와 통일의 촉매제가 됐다는 점을 기억하면 이 말은 지나친 '겸손'이다.

"1989년 10월 9일, 평화기도회를 마친 2000여명이 교회 문을 열고 광장을 향해 나섰습니다. 밖에선 수만명이 환호하며 우리를 맞이했지요.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습니다."

구(舊)동독 라이프치히 중심가의 성(聖)니콜라이 교회<사진>는 공산정권과 베를린 장벽을 함께 무너뜨렸던 동독 시민혁명의 성지(聖地)다. '동독의 명동성당' 격. 퓌러 목사는 이 교회 부임 2년이 지난 1982년 11월부터 매주 월요일 젊은이들을 모아 평화기도회를 열고, 결국 그 작은 모임은 동·서독 국경을 허무는 결정적 힘이 됐다.

"불의한 세상에서 교회의 참된 역할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했습니다. 공산정권에 반대하는 진정한 프로테스탄트(개신교 또는 저항자의 중의적 의미)의 문을 교회가 열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공교롭게도 니콜라이 교회는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이 본격적으로 확산된 역사적 장소다. 450년 후 이 교회에선 다시 자유를 향한 불꽃이 타올랐던 것이다.

퓌러 목사는 청년들에게 "인간의 불안과 고통, 죽음의 공포까지 이겨내는 예수의 십자가의 힘"에 관해 얘기했다. 자줏빛 대리석 계단 위에 거칠게 깎은 나무 십자가를 세우고, 그 아래 촛불을 켜게 했다. "아, 교회 안에서라면, 우리도 뭐든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구나." 이런 생각들이 라이프치히 젊은이들 사이에 퍼져 나갔다. 신자, 비(非)신자 구분 없이 교회 제단 앞 대리석 바닥에 앉은 젊은이들은 공산정권의 폭압에 억눌렸던 울분을 토해냈다. 기폭제가 된 것은 1988년 2월 '여행의 자유' 운동 지도자들을 초대한 것. 당시 동독인들은 여행과 언론, 선거의 자유가 없다는 데 불만이 많았다. 2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교회의 자리가 모자라 벽에 기대 서고 바닥에 앉아야 했다. 동독 정권은 교회 앞 광장에 경찰을 배치하고 교통을 차단하고 검문소를 세웠다. "비밀경찰 슈타지가 건너편 건물에서 출입하는 사람들의 사진을 찍었고, 쥐도 새도 모르게 연행해 갔습니다. 하지만 월요평화기도회에 참석하려는 사람들의 물결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1989년 9월 4일 월요기도회를 마친 사람들이 처음으로 교회 앞 광장으로 나섰다. 인원은 700여명 정도. 퓌러 목사는 "라이프치히는 수시로 산업박람회가 열리는 경제 중심지였고, 교회는 서독인과 서방 기자들의 왕래가 잦은 중심가에 있었던 탓에 동독 정부는 자신들이 '인도주의적, 관용적'이라는 점을 과시하려는 목적으로 초기에 강제 진압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한 번 거리로 나오기 시작하자, 시위 인원은 매주 월요일마다 불어났다. 그해 10월 2일에는 2만명 이상이 거리로 나섰다. 니콜라이 교회의 창문은 시민들이 붙여놓은 꽃으로 뒤덮였다. 교회 건물은 사람들이 가져다 둔 촛불로 둘러싸였다.

10월 9일, 동독 공산당은 당원 1000여명을 교회로 보내 미리 월요평화기도회 자리를 점거하게 했다. 퓌러 목사는 그날을 이렇게 기억했다. "나는 오히려 기뻤다. 공산당원들이 어디서도 접하지 못했던 '원수를 사랑하라'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며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길 기도했다."

10월 9일 동독의 거리에서 "우리가 국민이다(We Are the People)"를 외치는 시위대의 수는 7만명으로 불어났다. 시위대는 중무장한 경찰들에게 10시간 넘게 무자비한 폭행을 당하고, 결박당한 채 트럭에 던져져 실려갔다. 그다음 월요일에는 12만명으로 불었다. 시위는 동베를린 등 동독 전역으로 확산됐다. 1989년 11월 9일, 마침내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이듬해 동독 정권이 붕괴됐다. 퓌러 목사는 통일 이후에는 동독지역 실업자 구제에 나섰으며 2008년 65세로 은퇴한 이후에도 사회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야기를 마친 퓌러 목사가 한국 개신교 인사들과 기도를 시작했다.

"특별히 분단된 한국을 위해 기도합니다. 분단의 장벽을 열고 서로 마음을 열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당신뿐입니다.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날이 어서 오길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폭력과 억압이 떠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