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타운에 모셨으니 걱정 안 해도 되겠다고 생각했던 제가 바보였습니다." 8년 전 작은할아버지 김상열(88)씨를 실버타운에 모신 김건천(57·경기도 동두천시)씨는 4일 후회로 가슴을 쳤다. 조선시대 환관(宦官)의 양자인 김상열씨는 자손이 없어 건천씨가 같은 동네에 살면서 보살폈다고 한다. 건천씨는 치매 증세가 심해진 김 할아버지를 2003년 2월 인천의 한 실버타운에 입주시켰다. 그런데 실버타운 입주 6개월도 안 돼 연락이 두절됐다. 실버타운은 건천씨에게 면회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젊은 시절 김 할아버지는 서울 종로의 한약방 심부름과 미군부대 세탁일 등 돈 되는 일을 닥치는 대로 해 태릉에 논 7마지기를 샀다. 광복 이후 논이 개발지구에 편입되며 비싼 값에 보상받았고, 물려받은 서울 중랑구 묵동 땅값이 세 배로 뛰면서 인근에 2000평짜리 과수원도 샀다. 현금 30억원, 서울 면목동과 묵동의 빌딩 4채까지 재산이 130억원대로 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두 차례 양자를 들였다 파양(罷養)하는 등 가족관계가 평탄하지 못했다.
김 할아버지가 실버타운에 들어간 지 4개월 만에 상무이사 김모(54)씨가 양자가 됐다. 이후 그는 가족들과 김 할아버지의 접촉을 막았고 건천씨 가족의 접근을 불허하는 가처분 판결도 받았다. 상무이사 김씨는 "나는 뜻을 따랐을 뿐이다. 그분이 친척들을 오히려 의심했다"고 주장했다.
2004년 건천씨는 검찰에 진정서를 제출했지만 양자 김씨는 증거 부족으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최근 김 할아버지의 신변 보호인 백모(69)씨는 "양자 김씨로부터 5억원을 받는 대가로 법정에서 유리한 증언을 했었다"고 말했다. 건천씨는 "현재 할아버지의 유산은 양자가 된 김씨 부부 명의로 사실상 이전됐다"고 주장했다.
김 할아버지는 올해 초 수원 아주대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건천씨는 "작은할아버지의 임종을 못 지켜 드린 게 평생 짐이 될 것 같다"며 "어디 묻혀 계신지라도 (양자 김씨가) 알려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실버타운에 입주한 노인 상당수는 운영자들의 횡포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2005년부터 4년간 수도권의 한 실버타운 영업실장으로 일한 박모(여·42)씨는 "상당수의 실버타운은 갖가지 명목을 만들어 입주 노인들과 가족들에게 돈을 받아내는 것이 다반사"라고 말했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설립요건이 느슨해 저급 실버타운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노인 요양시설에 필요한 최소한의 시설을 갖추고 사회복지 자격증을 가진 시설장과 관리인, 사회복지사 1명을 두면 운영이 전적으로 업주 자율에 맡겨지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입주계약서가 노인들에게 불리하게 작성되는 경우도 많다. 중간에 퇴소할 경우 보증금에서 공제하는 금액도 천차만별이다. 판단력이 흐린 노인들에게 불리한 계약을 강요하는 일도 적지 않다. 일본의 경우 31개 조항으로 이뤄진 실버타운 입주계약서 가이드라인을 두고 있다.
노인복지법에 따르면 실버타운 설립자는 입주자들의 보증금 반환에 대비해 의무적으로 민간보험에 들어야 하지만 가입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당사자들이 실버타운업체의 신뢰도를 다각적으로 따져 신중하게 입주계약을 맺는 수밖에 없다"며 원칙론만 강조했다. 이동일 한국실버산업협회 회장은 "전세권자들을 위해 임대차보호법을 만든 것처럼 실버타운에 입주한 노인들을 보호하는 법제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