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色보다 빛… 色은 空"

조각가 김신일(40)은 폴리카보네이트(우유병·식품 용기 등에 쓰이는 플라스틱의 일종)판에 다 쓴 볼펜을 꾹꾹 눌러 문장을 새긴다. 몇 번이고 힘을 주어 문장을 새기면 글자를 쓴 부분이 불룩 튀어나와 마치 판을 뚫고 문장이 뛰쳐나오는 것 같은 형상이 된다. 언뜻 보면 밋밋한 작품이지만 문장의 요철에 빛이 드리우고 그림자가 지게 되면 선과 빛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입체 작품이 탄생한다. '압인(押印) 드로잉'이라고 하는 이 기법을 통해 작가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공(空)'이다.

28일까지 서울 평창동 김종영미술관에서 개인전 '제3의 아름다움'을 여는 김신일은 "'빨강=정열'처럼 '색(色)'에 대해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싶었다. 그래서 색을 배제하고 빛의 효과를 극대화한 압인 드로잉 작품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압인 드로잉'을 시작한 것은 서울대 조소과에 재학 중이던 1997년 무렵. 동양사상에 관심이 많아 '어떻게 하면 유(有)와 무(無)의 중간 지점을 표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 결과였다. 처음에는 종이 뒷면에 형태를 새겼고, 미국 뉴욕으로 유학 가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에서 석사 과정을 마친 이후인 3~4년 전부터는 폴리카보네이트로 재료를 바꿨다. "종이는 빛이 투과되지 않는 재질이라 한계가 있었죠."

이번 전시회에 그는 흰색 폴리카보네이트에 압인 기법으로 'When … are seen in the light of emptiness'(공허의 빛 속에서 …가 보일 때)라고 새긴 작품을 내놓았다. 문장의 주어가 들어가야 할 '…' 자리에는 수많은 글자를 중첩시켜 뜻을 짐작할 수 없게 했다. 문장 주어를 배제한 것은 작품에서 색을 없앤 것과 일맥상통한다. 김신일은 "주어는 문장의 뜻을 한정하기 때문에 배제했다"고 말했다.

'언어에 의한 범주화의 배제' 역시 김신일이 오래전부터 관심을 가져온 주제다. 그는 이번 전시회에 폴리카보네이트로 'Mind' 같은 단어나 'As It Is'(있는 그대로) 등 문장의 활자 하나 하나를 조각한 후 겹침으로써 단어와 문장의 뜻을 짐작할 수 없도록 한 '문자 조각' 시리즈를 선보였다. "문자를 덩어리화함으로써 언어로 인한 분별심을 차단하고자 했다"는 것이 작가의 설명이다.

전시회에는 이 밖에 일상의 풍경을 사진으로 찍고 그를 4만배까지 확대해 낯설게 보이도록 한 영상 작품 등이 나왔다. (02)3217-64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