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정액 50억원 안되는 자투리 펀드 빨리 팔아라

회사원 A씨는 지난 달 거래하던 증권사에서 일방적인 통보를 받았다. '고객님이 가입한 펀드의 설정액이 50억원이 안 되어 이달 말에 펀드가 청산되니 당장 환매하라'는 내용이었다. A씨는 일본 펀드에 가입했는데, 수익률은 마이너스 20%를 기록 중이었다. 그는 "매달 일정액을 넣고 있는 펀드인데 이렇게 없어질 수 있다니 황당하다"며 "원금 손실이 난 상태여서 원금이 회복될 때까지 좀 더 지켜보고 싶은데 무조건 해지해야 한다니 억울하다"고 말했다. 해당 펀드 운용사 관계자는 "A씨가 가입한 펀드는 설정액이 20억원밖에 안 되어 제대로 운용하기가 어렵다"며 "현행법상 덩치가 50억원 미만이면 고객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고 강제 청산할 수 있다"고 해명했다.

펀드 덩치가 작은 소규모 펀드, 이른바 '자투리 펀드'들이 고객 동의 없이 강제 청산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펀드 설정 후 1년 경과 시점에 50억원 미만이거나 설정 1년 이후 1개월 이상 계속해서 설정액이 50억원에 미치지 못하는 펀드는 강제 청산할 수 있게 돼있다.

5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이 규정에 따라 올 상반기(1~6월)에만 펀드 119개가 사라졌고, 하반기에는 전체 펀드의 20% 수준인 603개가 정리될 예정이다. 금융 당국과 금융투자협회는 궁극적으로 투자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펀드를 청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50억원도 안 되는 돈으로는 펀드를 제대로 굴릴 수 없고 운용 과정에서 소홀하게 방치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이유다. 하지만 투자자들은 "잘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 식으로 펀드를 찍어냈다가 돈이 모이지 않는다고 강제 청산하다니 투자자들만 봉이냐"고 반발하고 있다.

◆넘치는 자투리 펀드

지난해 말 한국의 펀드 수는 8687개(공모·사모펀드 합산)였다. 미국(7581개), 프랑스(7791개), 브라질(5618개)을 제치고 세계 1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이렇게 마구 만들다 보니 국내 펀드 10개 중 6개가 50억원 미만인 자투리 펀드다. 한 운용사 대표는 "자투리 펀드가 난립하는 것은 운용사들이 자초한 면이 크다"며 "유행하는 테마에 따라 졸속으로 펀드를 찍어냈다가 투자자 모집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포기하는 식의 행태가 반복되어 왔다"고 털어놨다.

자투리 펀드가 워낙 많다 보니 신참 펀드매니저에게 운용을 책임지게 하기도 한다. 수익률은 당연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순자산 50억원 미만 펀드의 최근 3개월 수익률은 평균 1.3%로 국내 주식형 펀드 평균 수익률(2.2%)에 못 미친다.

◆잘 팔리면 비슷한 펀드 쏟아내

운용사들은 시장에서 특정 펀드가 잘 팔린다고 하면 비슷한 펀드를 앞다퉈 내놓는 식으로 펀드를 찍어냈다. 금융 당국은 특별한 규제 없이 펀드를 개설하겠다고 등록만 하면 즉각 투자자를 모집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러다 보니 일단 팔고 나면 방치되는 경우가 많다.

김재칠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규모가 작은 펀드는 운용사들이 다양한 종목을 편입하기 위한 분석 비용을 많이 투자할 수 없고, 편입할 수 있는 종목 수가 제한돼 분산 투자 효과가 미약해진다"며 "궁극적으론 펀드 수익률도 낮아진다"고 말했다.

지난해 6월 금융 당국은 소규모 펀드를 '정리'하라고 증권업계에 강하게 압력을 넣었다. 하지만 1년 전이나 지금이나 50억원 미만 소규모 펀드가 전체 펀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6%대에서 거의 꼼짝도 않고 있다. 금투협 관계자는 "지난해 자본시장법 시행령이 개정되면서 자투리 펀드를 강제 청산할 수 있는 제도가 도입됐지만, 투자자들의 민원이 제기되는 데다 운용사 입장에선 놔두면 판매·운용 보수를 계속 받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청산 실적은 미흡했다"고 말했다.

◆토사구팽식 청산 논란

투자자들이 원치 않는 펀드 강제 청산은 '토사구팽(兎死狗烹·사냥한 뒤 쓸모 없어진 개를 처분한다)'이 아니냐는 반발이 만만치 않다. 특히 청산으로 인해 개인이 부담해야 하는 환매수수료나 새로 펀드에 가입할 경우 발생하는 가입 비용에 대해 운용사와 판매사가 공동 책임을 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에 대해 금투협 고위 관계자는 "추가 비용 부담을 강제할 규정은 없지만, 투자자들의 반발이 예상되는 경우 업계에서 자체적으로 판단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금융 당국은 일부 부작용이 있더라도 이번 기회에 자투리 펀드를 정리해야 방치된 펀드로 인한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다는 입장이다. 김철배 금투협 집합투자본부장은 "미국 펀드 규모의 100분의 1밖에 안 되는데 펀드 수는 더 많은 기형적인 구조를 10년 넘게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며 "일부 부작용이 있을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투자자를 위한 길인 만큼 협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