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캔버스는 한편의 스릴러 영화"

프랑스 영화감독 클로드 샤브롤(Chabrol)의 1968년 작 '암사슴들(Les Biches)'은 유복한 상속녀의 후원을 받은 거리의 여성 화가가 후원자의 부(富)를 탐내게 되면서 예술가로서의 자아를 잃고 파멸하는 과정을 그렸다. 상속녀와 함께 살면서 상속녀의 사치스러운 생활과 남자친구 등을 욕심내게 된 화가는 점차 상속녀의 외양과 태도를 모방하다가 마침내 상속녀를 살해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

내달 7일까지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갤러리현대 강남에서 개인전 '행복한 변덕: 완결편'을 갖는 미국 작가 딜리아 브라운(Brown·42)은 영화 '암사슴들'의 장면을 각색해 30여점의 유화로 만들었다. 브라운은 자신이 상속녀 역을 맡고 지인들에게 화가와 상속녀의 연인 역을 맡겨 연기를 했다. 그리고 그를 사진으로 찍어 화폭에 옮겼다. 전시회 제목이 '행복과 변덕'인 이유는 브라운이 인물의 캐릭터를 살려 상속녀에게 '변덕(Caprice)'이라는 이름을, 화가에게 '행복(Felicity)'이라는 이름을 붙였기 때문이다.

전시회 준비를 위해 방한한 브라운에게 작품의 의미를 물었다. "제 작품에 '특정한 메시지'란 건 없어요. 저는 원작 영화를 후원자에게 휘둘려 주체성을 잃고 마는 예술가에 대한 경고로 읽었지만 관객들은 제 해석에 고착되지 않고 작품을 자유롭게 해석하길 원해요. 뭔가 말할 게 있다면 물질적 풍요에 대한 예술가의 갈망과 그를 이용하는 부르주아 계급의 후원자와의 관계가 흑(黑)과 백(白)의 양면과 같다는 것, 자칫하면 서로가 서로를 희생양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는 것?"

브라운이 '암사슴들'을 처음 본 것은 2002년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고 입원해 있을 때. 그는 "강렬한 비주얼과 심리적 긴장감, 독특한 캐릭터에 매력을 느껴 몇 년간 가슴에 묻어뒀다가 2006년 무렵부터 작업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현대미술 작품엔 문학적 내러티브(narrative)가 있는 경우가 드물잖아요. 18세기 영국 풍자 화가 윌리엄 호가드(Hogarth)의 그림이나 프랑스 소설가 플로베르(Flaubert)의 소설 '마담 보바리'를 좋아하는데 그런 내러티브를 작품에서 구현해 보고 싶었죠."

평소 영화배우에 대한 환상을 가져왔고 연기 학원을 다니기도 했다는 작가는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는 욕구 때문에 화가가 아니라 상속녀 역을 맡았다"고 했다.

전시회에는 '행복과 변덕' 시리즈 외에도 브라운이 자신의 화장품과 화장 도구를 정물화처럼 그려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표현한 '살롱 스타일 자화상' 시리즈, 한때 영화배우였다가 예술가가 된 가상의 캐릭터(첼시 그린)를 만들고 연기자 출신 친구에게 그녀의 생활상을 연기하게 한 후 화폭에 옮긴 '첼시 그린' 시리즈 등도 나온다.

브라운의 다음 목표는 전업주부의 삶을 소재로 한 TV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각색해 그리는 것. 미혼인 브라운에게 '전업주부'란 '배우'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판타지다. "페미니즘 교육의 영향으로 전업주부가 된다는 건 부모님에게 반기를 드는 일이라고 생각해 왔죠. 그런데 사실 제 안에도 전업주부가 되고픈 욕망이 있거든요. 그 욕망을 작품을 통해 해소해 보고 싶어요." (02)519 -0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