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진의 길 위에서] 비 오는 청태산휴양림에서 마음을 다스리다

빗소리, 계곡 물소리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청태산자연휴양림, 늘씬한 잣나무 숲에 들어앉은 '숲속의 집' 테라스에 나와 앉았다. 폭이 2m도 안 되게 좁은 테라스이지만 그 사나운 장맛비가 한 방울도 들이치지 않는다. 빗줄기가 구슬발, 주렴(珠簾) 드리우듯 곧게 떨어진다. 마치 정지 화면을 보는 것 같다. 울창한 잣나무 숲이 바람마저 재우는 덕분이다.

이럴 땐 커피 한잔 안 할 수 없다. 뜨거운 커피로 속을 덥히며 낙숫물 떨어지는 처마를 응시하자니 마음이 호수처럼 잔잔해진다. 거울처럼 맑아진다. 지겨운 장맛비도 이곳에선 시(詩)처럼 사람을 위안해 준다.

비 쏟아지는 주말 하룻밤을 강원도 횡성군 둔내면 청태산자연휴양림에서 묵었다. '숲속의 집'은 통나무로 지어 집 안에 있어도 나무향이 싱그럽다. 천장이 높아 시원스러운 아래층엔 예닐곱명도 잘 수 있는 큰 방, 네명쯤 들어갈 작은 방에 아담한 거실과 부엌을 갖췄다. 계단으로 올라가는 다락방은 열명이 뒹굴어도 너끈하겠다. 사방 어느 쪽 창(窓)으로 내다봐도 푸른 잣나무 숲이다. 숲 바닥엔 잣이 널려 있어서 집 문 앞까지 다람쥐가 기웃거린다. 마당엔 고기 구워먹는 바비큐 통과 피크닉 테이블이 놓여 있다. 이런 별장, 이런 콘도가 어디 다시 있을까 싶다.

부엌 싱크대 수도꼭지엔 '지하 100m에서 끌어올려 식수 적합 판정을 받은 암반수'라고 쓰여 있다. 취사도구, 그릇도 모두 준비돼 있어서 수건과 세면도구만 들고 오면 된다. 스무명도 묵을 수 있을 이 9인용 '숲속의 집'을 평일 하루 빌리는 값이 6만원이다. 주말과 요즘 같은 성수기엔 9만8000원, 그래도 헐하다. 청태산휴양림엔 '숲속의 집'이 3만2000원짜리 4인용부터 모두 열한 채 있다. 숲속에 드문드문 떨어져 있어 그야말로 호젓한 산장이다.

청태산휴양림에선 비가 퍼붓는다 해서 숲속 산책을 거를 일이 없다. 키가 15m도 넘는 잣나무 숲에 지그재그로 나무 데크 길이 깔려 있다. 숲이 웬만큼 비를 가려주고 데크 길이라 진 땅을 안 밟아도 된다. 빗속이어선지 숲 향(香)이 더 진하게 와 닿는다. 기울기가 완만해 휠체어 탄 장애인, 유모차 탄 아기도 편히 오를 수 있다. 비가 오면 가장 신나는 것이 계곡물이다. 생명으로 콸콸 넘쳐난다. 주변 관목 잎들도 아연 생기를 띤다. 어둑한 숲속에서 이끼가 유달리 파랗게 빛을 발한다. 하얀 산목련 꽃이 함초롬히 젖어 고개를 떨궜다.

청태산휴양림엔 크고 작은 방이 스물일곱 개 딸린 휴양관도 있다. 스무명에서 여든명까지 단체 손님을 받는 수련장도 세 채다.

청태산처럼 산림청이 거느린 국립 자연휴양림이 전국에 서른여덟 곳 있다. 저마다 이름난 산, 아름다운 숲에 자리 잡았다. 1988년에 처음으로 생긴 대관령휴양림은 90년 된 금강송 숲과 맑은 계곡이 어우러져 탈속(脫俗)한 듯하다. 강원도 인제 방태산휴양림은 가을이면 빨간 단풍이 풍성한 계곡과 함께 절경을 이룬다. 경북 영덕 태백산맥 끝자락 칠보산휴양림에선 동해 일출을, 충남 보령 오서산휴양림에선 서해 일몰을 볼 수 있다.

전남 장흥 천관산휴양림은 봄 동백과 가을 억새를, 경남 남해 편백휴양림은 피톤치드 내뿜는 편백 숲을 자랑한다. 제주시가 관리하는 한라산 기슭 절물휴양림을 어느 늦여름 찾았을 땐 안개비와 운무에 잠긴 숲길을 꿈꾸듯 걸었다. 등산객과 야영객, 오토캠퍼까지 합쳐 지난해 국립 휴양림에 250만명이 다녀갔다.

도(道)나 시·군이 운영하는 휴양림도 일흔두 곳에 이른다. 충남 태안 안면도휴양림엔 기품 있는 안면송(松)이 천연림을 이루고 있다. 국도 건너 지하도로 연결된 안면도수목원까지 즐길 수 있어 한 해 65만명이 찾아든다. 경기 가평 축령산휴양림은 사철 푸른 잣나무 숲에 봄이면 키 큰 철쭉이 터널을 이룬다. 충북 청원 옥화휴양림은 나무에 약을 치지 않아 해 진 뒤 숲길에서 반딧불이 떼를 만날 수 있다.

풍광이 빼어나고 값도 싸고 잘 관리되는 자연휴양림은 '국민 숙소' '국민 휴양지'라고 할 만하다. 그래서 숙소 예약하기가 어렵다. 지역을 둘로 나눠 매월 1일과 3일 선착순으로 인터넷 예약을 받는다. 인기 있는 휴양림과 주말 방은 자정에서 1초만 지나도 예약이 차버리기 때문에 컴퓨터에 익숙지 않은 중·노년은 엄두를 못낸다. 7~8월 성수기엔 40일 전에 인터넷 예약을 받은 다음 추첨으로 투숙객을 뽑는다. 좀 더 효율적으로 고르게 숙박 기회가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해야 할 것 같다.

청태산휴양림 '숲속의 집' 거실엔 강원도 사투리로 된 안내문이 붙어 있다. "어여오시우야. 방구워요. 마카 둔너서 덮으신 포대기·요·비개는 베름싹에 붙어 있는 농짝에 넣지말고 구석때기에 처내삐래두면 즈희가 날래 갖고 갈거래요. 시나이 댕겨 가우야."

그 아래엔 친절하게 '해설'도 쓰여 있다. "어서오세요. 반갑습니다. 덮으신 이불·요·베개를 벽에 있는 붙박이장에 넣지 말고 구석에 밀어 놔두시면 저희가 정리하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내내 미소가 떠나지 않은 자연휴양림의 하룻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