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오후 2시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의 심부름 대행업체 '실버들'. "예,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라며 전화를 끊은 사장 권영록(70)씨가 사무실에 앉아 있던 안상근(67)씨에게 일을 배당했다. "여의도 사무실로 오후 6시까지 꽃바구니를 보내달라"는 주문이다.
"허허… 오늘 일복 터졌네." 안씨는 이날 오전 10시부터 경기도 오산의 한 학원에서 가구와 책을 정리해주는 일을 마치고 막 사무실로 들어오는 길이었다. 두 번째 일을 맡은 그는 힘든 기색도 없이 주소 쪽지를 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안씨는 근처 시장에서 3만원짜리 꽃바구니를 사서 손에 들고 지하철을 탔다. 그는 지난 4월부터 이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다. "집안에만 있기 답답하고, 생활비도 필요해서"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렇게 일을 해 한 건당 봉사료 7000~1만원을 받으면 75%가 안씨 손에 들어간다.
'노인 심부름 대행'이 인기를 끌고 있다. 20·30대 젊은이들의 오토바이 퀵서비스보다 속도가 느린 대신 저렴한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다. 이 사업은 지하철을 무료 이용할 수 있는 65세 이상 노인들의 특권을 최대한 활용한다. 안씨가 다니는 '실버들'은 아예 입사 연령이 '65세 이상'으로 정해져 있다. 직원 50여명이 전부 노인이다.
'마트에서 김치를 사서 호텔에 있는 일본인 관광객에게 전달해달라', '여자 친구에게 생일 케이크를 전해달라', '형광등을 갈아달라'는 요청이 주로 들어온다. 맞벌이나 혼자 사는 젊은이들의 심부름이 많다.
사장 권씨는 "노인들이 젊은이들의 잔심부름이나 한다고 우습게 봐선 안 된다"며 "자기 힘으로 일해서 먹고사는 것이 좋지 않으냐"고 했다. 한국 사회는 급격히 노령화하고 있다. 65세 이상 노인이 전체 인구의 11.3% (542만명·2010년 기준)를 차지한다. 지난 2000년의 7.2%(339만명)보다 크게 늘었다. 이런 노령화에 대한 우려가 많지만, 거꾸로 노인들이 젊은이 영역에 파고드는 일도 늘어가고 있다. 한국노인인력개발원 정종보 사업운영국장은 "노인들이 젊은이들 영역에 진출하는 현상은 고령사회 극복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