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막힌 길, 잘린 길, 그러나 가야 할 길

"한반도 중앙에 위치한 덕분에 모든 길은 파주로 통하는데

평양냉면 면발이 툭 끊어지듯 파주에선 길이 임진강에 빠져

분단과 이념으로 얼룩졌지만 막힌 길 뚫고 다시 가야 할 것"


인간은 길을 가는 존재라고 한다. 정신과 의사 스캇 펙의 탁월한 심리학 저서 세 권은 그것을 잘 은유한다. '아직도 가야 할 길' '끝나지 않은 여행' '그리고 저 너머에'라는 책의 제목처럼 우리는 그렇게 길을 가는 존재다. 평생 앞만 보고 달리던 나는 막히고 끊긴 길 앞에서 모처럼 쉬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 경기도 파주 출판단지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심학산 둘레길'을 찾는 것도 그 호사 중의 하나다.

칠부 능선 산허리에 만들어진 둘레길 6.8km를 다 돌려면 두 시간 정도 걸린다. 심학산의 높이가 해발 192m밖에 안 돼 둘레길도 야트막하지만 도토리나무 등 숲 속이라 그늘 속을 걸어서 좋다. 한강과 임진강은 물론 일산·파주·강화·김포, 멀리 개성까지 보이는 탁 트인 전망 또한 일품이다. 자유로(路)와 가까워 접근성이 편해 파주뿐 아니라 고양과 서울에서도 많은 사람이 찾는다. 언제부턴가 나는 심학산 둘레길을 돌면서 길에 대한 생각에 빠지곤 한다. 특히 역사를 통해 파주땅 위에 그려진 길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기도 하고, 때론 벅차기도 하다.

낯선 곳의 모퉁이를 돌아가야 할 때, 안갯속으로 사라진 길이 궁금할 때, 더 가야 할 길 앞에서 맥없이 주저앉아 있을 때, 길인 줄 알고 왔는데 갑자기 길이 사라졌을 때, 그땐 파주에 와 보라. 오기 어렵다면 지도라도 펼쳐보라. 평양냉면 면발이 툭 끊어지듯, 서울 가래떡 줄기가 싹둑 잘리듯, 파주에선 모든 길이 임진강에 풍덩 빠져 없어진다. 미쳐 빠지지 못한 눈길만이 남아 멀리 북쪽을 향해 날아가는 기러기를 볼 뿐이다.

최근에는 걷는 게 추세다 보니 길도 브랜드화하자고 동네방네 바쁜 모양이다. 올레길·둘레길·마실길·옛길 등등 이름도 많다. 하지만 역사 속에 그어진 길을 찾다 보면 파주는 단연코 '길길이 고장'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향했다지만, 한반도에선 모든 길이 파주를 지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큰 강 7개 가운데 대표적인 2개의 강이 만나는 곳은 파주밖에 없다. '교하(交河)'는 한강과 임진강이 만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강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또한 고려 500년, 조선 500년 무려 1000년 동안 개성과 한양은 한반도의 수도였다. 그 사이에서 파주는 1000년의 수도권이었다. 모든 길이 파주로 통하는 이유다.

아니 그보다 더 이전에 파주는 한반도의 길목이었다. 삼국시대에 고구려·백제·신라의 말발굽소리가 끊이지 않던 정복의 길은 파주에서 뒤엉켰다. 관미성·월롱산성·덕진산성·봉서산성·칠중성·호로고루성 등이 이를 증명한다. 통일신라시대엔 세계 문명사를 바꾼 실크로드가 경주까지 이어졌으니 그 길목에 파주가 있었으리라는 가정은 추론이 아니라 팩트다. 개경에 도읍한 고려는 한양(남경)에 또 다른 궁궐을 지어놓고 오르내렸다. 개경과 남경을 오가는 관료와 백성을 위한 숙박시설인 혜음원터가 파주 광탄면 용미리에 미발굴 상태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조선시대엔 어땠는가. 임진왜란이 나자 허겁지겁 명나라 있는 곳으로 꽁무니를 빼던 선조의 몽진길은 임진나루에서 절정을 이룬다. 무수리 출신인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재위 52년 동안 수없이 어머니 묘소를 찾았던 영조의 능행길로 파주 됫박고개 마루가 닳았다. 조선시대 최고의 길은 단연코 연행(燕行)길이다. 요즘 말로 베이징 가는 길이다. 조선과 중국의 사신뿐 아니라 당대의 많은 해외파 지식인들이 다니던 길이다. 물론 그 길은 한양에서 의주까지 이어지지만, 요즘 제대로 체험할 수 있는 길은 파주의 혜음령에서 임진나루까지 이어진 78번 도로다. 이 길을 통해 연암 박지원이 지나갔고, 천주교가 들어왔으며, 조선의 근대화가 이뤄졌다.

한국 현대사의 질곡에서 파주는 현장이요 상처다. 개화의 시작은 철도였고, 경의선은 그 중심이었다. 지금은 녹슨 철도 위에 상처뿐인 철마(鐵馬)가 임진각에서 북녘을 향해 엎어져 있다. 그와 나란히 통일의 염원을 실어나르는 통일로가 자리한다. 최근에는 한강과 임진강을 아우르는 자유로가 곧게 뻗어 힘찬 역동성을 보여준다. 두 세대를 넘는 분단의 아픔과 이데올로기의 상처로 얼룩진 현장에서 파주의 모든 길은 낭떠러지처럼 끊겨 있다.

인간은 걸으면서 진화한 존재다. 계속 걸어야 살아남고 더 걸어가야 행복하다. 가야 할 길을 더 가지 못할 때 우리는 아프고 절망하고 고통스럽다. 그래서 막힌 길, 잘린 길 앞에선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러나 운명은 앞에서 날아오는 돌이다. 얼마든지 피할 수 있고 잡아서 되던질 수도 있다. 막힌 길은 뚫고 잘린 길은 이어서 다시 가야 한다. 그깟 돌부리쯤이야 뭐가 대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