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속 한민족사 탐방 현장] 와서 보니, 안중근 의사 고초 더 와 닿네요

"안중근! 안중근 사세요!"

1세기 전 민족의 영웅이 순국한 역사의 현장은 잡상인들로 어수선했다. 지난 11일 중국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시 여순감옥 입구. 줄지어 선 좌판대에서는 빛바랜 안중근 전기와 볶은 해바라기씨 봉지가 경쟁중이었다. 중국 상인은 '안중근 연구'라 적힌 표지의 책자를 거꾸로 든 채 한국인 방문객들 소매를 잡아끌었다. "안중근 사세요…."

감옥 정문 앞 광장에 이르자 이동언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원이 마이크를 잡았다. "안 의사는 감옥에 들 때 몸무게가 54.5㎏, 순국 당시엔 56.5㎏이었습니다. 수감 중에 체중이 오히려 늘어난 거지요. 그만큼 마지막까지 의연했다는 뜻입니다." 안 의사는 이곳 옥중에서 92일 만에 자서전을 탈고하고 1910년 3월 26일 사형을 맞는다. "일제는 유해조차 유족에게 인도하지 않았습니다. 저 북문 밖으로 옮겨져 야산에 매장됐다는데 아직도 못 찾고 있습니다." 다들 목을 빼고 둘러봤다. 북문 너머엔 새로 지은 고층 아파트들만 병풍처럼 서 있었다.

◆안 의사 순국 현장 여순감옥

조선일보가 기획한 '선생님과 함께하는 중국 속의 한민족사 탐방' 5박6일 여정의 시작은 여순이었다. 서울·인천·경기·충청권 교사 198명 등으로 구성된 1차 답사팀은 민족의 아픔이 서린 유적지 앞에서 숙연했다. 감옥 규모는 의외로 컸다. 영화에서 봤음 직한 좁은 복도를 따라 감방 258개가 상하좌우로 줄지어 있었다. 어둠침침한 고문실, 사형집행장은 소름이 끼쳤다. 시멘트 바닥에 놓인 큰 대(大)자 고문대, 벽에 주렁주렁 매달린 쇠사슬과 몽둥이들…. 안 의사 감방은 간수부장 당직실 옆에 있었다. "와서 보니 그분이 겪었을 고초가 더 가슴깊이 와 닿네요." 부천 부흥초등학교 황송선(49) 교사의 입에서 탄식이 새나왔다.

◆유리 진열장 속 '호태왕비'

지안(集安)시 광개토왕비 유적지는 중국 동북공정의 현장이기도 했다. 높이 6.39m, 무게 37t의 육중한 화강암 비석은 유리진열장 신세였다. 중국 당국은 비석을 '보호'한다며 통유리벽을 둘러치고 황토 지붕까지 얹었다고 하지만 마치 포박당한 거인 같았다. 중국 안내원은 "중국 소수민족인 고구려의 왕인 호태왕…"이라며 무표정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유리관 안에서는 사진 촬영도 금지였다. 김현숙 동북아재단 연구원은 "얼마 전까지도 한국 답사팀이 오면 중국 공안이 졸졸 따라붙기도 했다"며 혀를 찼다. 전시장 밖으로 나오니 조선족 상인들이 장뇌삼을 팔았다. "저희 할아버지 독립군임다. 세개 한국 돈 만원…."

◆백두산 정상 붉은 경고문

분수령은 백두산 등정이었다. 서파(坡·언덕길)행 입구에 이르자 '長白山(장백산)' 한자 표지가 우뚝했다. 모두 1236개 계단이 정상까지 나있다. "태극기나 현수막을 펼치거나 애국가를 합창하거나 구호를 외치면 절대 안 됩니다." 조선족 가이드는 몇 번씩 다짐을 받았다. 날씨는 끝내 종잡을 수 없었다. 입구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쾌청하던 하늘이 정상 쪽으로 가면서 흐려지더니 차에서 내릴 때는 급기야 빗줄기를 토했다. 그래도 다들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2750m 꼭대기에는 콘크리트로 만든 경고문 비석이 보초처럼 서 있었다. '변경을 넘는 것을 엄금하며 변경 질서를 교란하는 것을 엄금한다' '자신의 언행을 중시하며 국민형상을 수호하자'… 섬뜩한 경고문(2010년 8월 1일자)이 흰 바탕에 붉은색 한자·한글로 병기돼 있었다. 고대했던 천지는 안개비 속에 숨어 좀처럼 위용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도 운 좋은 사람은 있었다. 김포 고촌중학교 체육교사인 강학주(49)씨가 그랬다. "기다리고 있으니 잠깐 구름이 걷히면서 천지의 3분의 1 정도가 보였다"며 찍은 사진을 보이며 웃었다.

◆"역사 교육의 밑거름 되길"

답사팀은 그밖에 여순의 러일전쟁 유적지인 203고지, 선양(瀋陽)시의 9·18(만주사변)기념관과 북릉공원 등도 돌아봤다. 이번 행사는 1987년부터 이어온 '일본 속의 한민족사 탐방' 후속편이었다. 연례 일본 답사가 지난 3월 일본 동북지방 대지진으로 잠정 중단되면서 대신 마련됐다. 신한은행과 포스코가 협찬한 이번 탐방에는 고고미술사학계 원로인 정영호 단국대 석좌교수와 고구려 전문가인 김현숙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독립기념관의 이동언 책임연구위원이 동행했다. 서울삼성병원은 의료진을 지원했다. 정 교수 등은 숙소에서, 버스 안에서, 유적지에서 맛깔스러운 강의와 설명으로 현장 이해를 도왔다. 마지막 만찬장에서 정 교수가 단상에 올라 길고 고됐던 여정의 의미를 정리했다. "우리는 이번에 동북 3성 지역을 숨 가쁘게 돌며 고대사부터 근현대사를 훑어봤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고초를 겪은 감옥부터 고구려 유적지, 동북공정의 현장에 이르기까지 지나오면서 만감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부디 하나하나 교육 현장의 밑거름으로 잘 활용되기를 바랍니다." 교사들은 박수로 화답했다. 오산 세마중학교 이기섭(41) 교사는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아이들에게도 보고 느낀 것을 그대로 전하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