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명품 같은 수제화 팝니다" 성수동 30년 장인들이 뭉쳤다

"골(발 모형 틀)에 씌울 어퍼(Upper·구두 위쪽을 덮는 가죽) 주세요!"

지난 21일 서울 성동구 성수 2가동의 한 낡은 건물 2층. 요란하게 돌아가는 재봉틀 사이로 힘찬 소리가 들렸다. 264㎡(80평)짜리 공장에는 20여명의 손을 거친 검정 여성 구두 30켤레가 리본을 붙이는 마무리 작업을 기다리고 있었다. 성수동 구두골목에서 구두공장을 운영하는 사장 도영기(62)씨는 "잘나갈 때하고 비교하면 반도 안 된다"며 "하루 100켤레 정도 만들면 그만이다"고 말했다.

서울 성수동 구두골목은 1980년대 말 '수제화의 메카'였다. 한때 국내 수제화 생산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시절이 있었다. 서울 명동 미도파백화점과 신세계백화점을 중심으로 몰려 있던 수제화 공장들이 도심 개발이 진행되면서 땅값이 싼 성수동으로 몰렸다. 구두 장식 등을 공급하는 영세한 부속업체까지 합치면 600여개 업체(3000여명)가 이 골목에 모였다.

도영기 사장은 1988년부터 성수동 골목에서 잔뼈가 굵었다. 22세 때 구두 제작에 뛰어들어 종로와 명동을 거쳐 성수동에 정착했다. 39세가 되던 해 성수동에 '도우상사'라는 공장을 차린 도씨는 하도급을 받아 일했다. 그의 공장에서 만들어진 구두는 금강, 쌈지, 소다 등 국내 유명 브랜드 상표가 달려 납품됐다. 성수동 구두공들은 대부분 자기 상표가 없다.

외환 위기가 닥치면서 성수동 구두 골목은 쇠락했고 3분의 1 정도가 부도가 났다. 부도난 구두공들은 중국으로 건너가 값싼 인건비를 활용해 국내로 수제화를 수출했다. 1997년부터 성수동 구두공장을 운영하던 윤명언(66)씨는 "그때부터 네 차례나 공장문을 닫았다 열었다"고 밝혔다.

"OEM은 미래가 없다. 브랜드가 있어야 산다"며 동대문 시장 등에 매장을 낸 공장들도 있었지만 2만~3만원 하는 값싼 중국산 수제화와 경쟁할 수 없었다. 드물게 백화점 입점에 성공해도 오래 버티지 못했다. 이해삼 성동제화사업주협회 사무국장은 "판매 가격의 40~50%를 백화점 수수료로 떼이고, 철마다 인테리어 바꾸는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손해만 보고 결국 다시 OEM 하도급으로 주저앉는다"고 했다.

버티는 데 급급하던 구두골목 사람들은 2009년 활로를 찾기 위해 성동제화사업주협회라는 단체를 만들고 머리를 맞댔다. 이해삼 사무국장은 "구두공들은 그동안 자기 디자인과 아이디어를 베껴갈까 봐 교류하지 않았다"며 "구두공들이 '우리도 뭉쳐야 살아남을 수 있다'며 나섰다"고 말했다. 10여명이었던 회원 수는 100여명으로 늘었다.

회원들은 한 달에 한 번 모여 발전 방향을 논의했다. 작년 10월엔 원가를 줄이기 위해 구두 접착에 쓰는 본드를 공동구매하기도 했고 수제화의 착화감을 높이기 위해 밑창 테두리 부분을 가죽으로 싸보자는 의견도 나눴다.

그러다 판로를 뚫기 위해 "공동 매장을 열어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중간 유통마진을 뺀 저렴한 가격으로 국내 유명 브랜드와 같은 품질의 구두를 팔자는 아이디어였다. 성동구청의 도움으로 지난 5월 행정안전부의 '마을기업 육성사업'에 선정돼 2년간 8000만원(구비 25%)을 지원받게 됐다. 구두공들은 지난 15일 지하철 2호선 성수역 인근에 공동판매장인 132㎡(40평) 크기의 '서울 성수 수제화 타운(SSST)'을 열었다. 이한영 협회 회장은 "전국 곳곳에 이런 직판장을 내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젊은 사람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던 구두 골목에 컴퓨터정보학과를 졸업한 유두호(25)씨가 작년 4월 문을 두드렸다. 인터넷 쇼핑몰을 운영하는 누나의 사업을 도와주다 구두에 매료됐던 것이다. 한국의 '페라가모'처럼 유명 제화업체를 만들어보겠다는 꿈을 품었다.

'서울 성수 수제화 타운' 매장에는 성수동 구두공들이 만든 구두 600켤레가 진열됐다. 매장 관계자는 "백화점에서 20만~30만원 하는 수제화를 이곳에서는 같은 품질로 10만원 초반대에 살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