곗돈 타서 영화 찍고, 상금 타서 또 찍고

'키노망고스틴'(약칭 망고스틴). 영화관을 뜻하는 '키노(Kino)'와 껍질은 딱딱하고 알맹이는 하얀 열대과일 '망고스틴'을 합성한 말이다. 감독, 배우 등 4명이 고정멤버로 참여하고 있는 영화창작집단의 이름이다. 언뜻 들어선 정체를 알기 힘든 이 사람들이 요즘 공포·SF·스릴러물 등 한국 초저예산 장르영화계의 '종결자'(절대적 우위를 점하는 사람)로 떠올랐다.

망고스틴이 존재감을 영화팬들에게 확실히 각인시킨 작품은 22일 폐막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부천영화제)의 최고 화제작 '에일리언 비키니'이다. 500만원의 제작비가 들어간 작품으로, 종족번식을 위해 지구에 급파된 미녀 에일리언과 혼전 순결을 서약한 남자가 하룻밤 새 벌이는 좌충우돌을 그렸다. 세 차례 상영 표가 매진됐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앞서 지난 2월 일본 유바리 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으면서 국제적 '인증'을 먼저 받았다. 망고스틴은 지난해 부천영화제에선 '이웃집 좀비'로 심사위원상과 관객상을 받기도 했다.

망고스틴은 연출, 시나리오, 촬영, 편집, 연기 등 영화제작의 모든 부분을 멤버들이 자체 해결하는 '가내수공업형 영화제작사'이다. 가끔 연기자 등 스태프가 더 필요하면 친구·후배들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15년 경력의 영화분장사 장윤정(37)씨와 영화 '황진이' 조감독 등을 거친 감독 오영두(36)씨가 2007년에 만들었다. 두 사람은 부부 사이다. 25일 서울 마포구에서 망고스틴 대표를 맡고 있는 장씨 부부와 배우 홍영근(33)·하은정(33)씨를 만났다.

먼저 '망고스틴'이라는 특이한 이름에 대해 물었다. 장씨는 "내가 망고스틴 과일을 워낙 좋아해 이름에 꼭 넣어야 한다고 우겼다"고 했다. 호러(이웃집 좀비), SF(에일리언 비키니·영건인더타임) 같은 장르영화만 고집하는 이유를 묻자 "원래 장르영화를 좋아하는 데다가, 외국에서도 통할 수 있는 게 장르영화이다. 드라마나 코미디는 사회적 배경을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데 액션이나 호러는 그런 게 필요 없다"(오영두)고 답했다.

영화제작의 필수 요소인 자금과 배우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까. 비결은 철저한 '자급자족'이다. 장씨는 "첫 영화 제작비 2000만원은 내가 곗돈을 타서 마련했고, 네 명의 멤버가 감독, 조감독, 분장, 연기 역할 등을 돌아가며 맡는 방법으로 인력 문제를 해결했다"고 했다. 영화제 상금도 '재원(財源)'이다. 유바리영화제 상금 200만엔(2700만원)으로 세 번째 영화 '영건인더타임'을 찍고 있다.

배우 하은정씨도 거든다. "지금까지 만든 영화 두 편은 오 감독 부부의 12평짜리 옥탑방 집 안에서 거의 모든 촬영을 했다. 사운드, 음악, 특수효과 등은 지인들이 도와줬다. 장 대표가 집에서 밥까지 해주니까 돈 들 일이 별로 없다"는 설명이다.

이들의 영화작법에는 '즉흥성'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영화의 뼈대인 시나리오를 촬영 전에 미리 다 써놓지 않고, 영화를 찍으면서 즉석에서 스태프들 간에 의견을 나누며 발전시켜 나가는 식이다. 멤버들은 이런 작업 시스템이 "전혀 불편하지 않다"고 했다.

영화가 아무리 좋아도 생계는 현실의 문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멤버들은 각자 다른 일을 함께 하고 있다. 장씨는 영화 분장일을 계속 하고 있고, 오 감독은 영상 편집 같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고 있단다. 홍씨는 상업영화의 배우로, 하씨는 영어학원 강사를 하면서 돈을 번다.

곗돈까지 깨 가며 영화를 찍으려는 이유를 묻자 오 감독은 "영화 만드는 게 업(業)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교사가 학생을 가르치고, 기자가 기사를 쓰듯이 영화감독이니까 당연히 영화를 만들어야죠. 제일 잘하는 일이고, 재밌기까지 하니까 계속 하는 게 너무 당연하죠. 게다가 그걸 평가받을 수 있는 기회까지 얻었으니 행복합니다."

이들은 "상업영화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당연히 할 거다"라고 했다. 오 감독에게는 실제 최근 상업영화 쪽에서 제의가 들어오기도 했다고 한다. "연출이면 연출, 연기면 연기 각자의 분야에서 이름을 알리고 자리를 잡아야 키노망고스틴도 계속 유지가 될 수 있다"(홍영근)는 설명에서 당당함이 느껴졌다. 오 감독은 "상업영화를 만들게 되더라도 우리의 뿌리인 키노망고스틴은 계속 함께 활동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