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화는 명화를 볼 수 없었다… 엄마 생각에 눈물날까봐

"언니, 내 가방 어디 있어?"(정경화) "응, 경화야, 여기 있어. 걱정 마."(정명화)

지난 29일 오후 제8회 대관령국제음악제가 한창인 강원도 평창군 알펜시아 리조트 내 콘서트홀. '저명연주가 시리즈' 연주회를 10분여 앞둔 무대 뒤 대기실은 설렘과 긴장으로 꽉 찼다. 손가락 부상 이후 6년 만에 실내악 무대에 서는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63)는 굳은 얼굴로 의상을 꼼꼼히 살폈다. 그런 동생과 역시나 6년 만에 한 무대에 서는 첼리스트 정명화(67)는 너그러운 미소로 동생을 다독였지만 긴장한 빛이 역력했다. 지인들은 "오랜만의 연주라 두 사람이 더 섬세하게 마음을 조이고 집중하는 것 같다"고 했다.

해발 700m 대관령에서 '빛이 되어'를 주제로 열리는 이번 음악제의 가장 큰 빛은 정명화·정경화의 합동 무대였다. 이들은 피아니스트 케빈 케너와 함께 브람스의 '피아노 삼중주 1번'을 선보였다. 브람스가 20대 초반 작곡했다가 음악적 역량이 절정에 달한 50대 후반 개작한 것으로, 자매의 모친인 고(故) 이원숙 여사가 생전에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한복 디자이너 이영희의 파란색 모시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오른 정경화는 "연주 전 말을 잘 안 하는 편인데 이 말만은 꼭 하고 싶다"며 "엄청난 폭우에 상처 입은 분들께 오늘 연주를 바친다"고 했다.

정명화가 첼로 독주로 먼저 도입부를 열고, 이어 정경화가 바이올린으로 받았다. 두 현(絃)이 하나로 어우러지자 콘서트홀은 거대 오케스트라의 연주처럼 깊이 있고 묵직한 현의 울림으로 가득 찼다. 정명화는 활 놀림을 분주히 이어가면서도 동생의 얼굴을 수시로 보며 호흡을 맞췄다. 정경화는 그간의 부재(不在)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녹슬지 않은 저력을 보여줬다. 끝 모를 화려함을 과시하던 예전 연주보다 한결 절제된 원숙미가 묻어났다.

연주 후 무대 뒤에서 정명화는 감격에 차 울먹였고, 정경화는 "정말 환상적인 밤이었다"며 만족스러워했다. 다음날 기자들과 함께 한 오찬 간담회에서 정경화는 "명화 언니의 첼로 소리를 듣는 순간 눈물이 나와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연주를 시작하기도 전에 찔찔 울면 안 되겠다 싶었다"며 웃었다. "어렸을 때부터 트리오를 만들어 실내악을 시키신 어머니의 선견지명이 생각나고 4년 전 이맘때 갑자기 세상을 뜬 큰언니(故 정명소씨)도 생각나고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정명화·정경화·케빈 케너에 앞서 이날 연주회에서는 토드 필립스·클라라 주미 강(바이올린), 토비 애플(비올라), 고봉인(첼로)이 하이든의 '현악사중주'를, 김은경(클라리넷), 천―웬 황(바이올린), 토비 애플(비올라), 고봉인(첼로)이 박―파안 영희의 '만남 I'을, 신현수(바이올린), 성민제(더블베이스), 이혜숙(피아노)이 보테시니의 '그랜드 듀오 콘체르탄테'를 연주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재독 작곡가 박―파안 영희(66)는 연주 직전 무대에 나와 "1970년대 독일 유학 중 신사임당의 시 '사친(思親)'을 읽으며 혼란스럽던 음악의 길을 찾고 이 곡도 만들었다"고 소개했다. 더블베이스 연주자 성민제(21)는 현란한 운지와 경쾌한 활 놀림으로 더블베이스의 매력을 과시했다.

알펜시아 콘서트홀은 나무 냄새가 그윽한 가운데 또렷하고 결 고운 소리로 실내악 무대 합격점을 받았다. 대관령국제음악제는 13일까지 계속된다. (033)249-3372, 33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