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셔츠만 걸치고 펄펄… "이런 액션 내 또래들 못할걸?"

배우 안성기(59)가 변했다. 사람 좋아보이는 미소를 띠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커피 한 잔을 권할 것만 같은 그가 김지훈 감독의 '7광구'(4일 개봉)에서 처절하게 맞고 때리는 액션 배우로 돌아왔다. 정의로운 역할도 아니다. 의도치 않게 괴물 탄생의 단초를 제공하고 나쁜 일을 저질러버리는 캡틴 '정만'을 맡았다. 정만은 제주도 남단, 7광구에 떠있는 석유시추선 이클립스호를 지휘하는 대장이다. 하지원(해준)과 오지호(동수)가 그의 팀원으로 나온다.

29일 서울 강남 한 카페에서 안성기를 만났다. 셔츠 차림으로 있던 그는 사진 촬영을 요청하자 "셔츠만 입으면 너무 편해 보이니 재킷을 입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는 "그래도 지금은 많이 편해진 거다. 예전에는 신부님처럼 입고 다녔다"고 했다. '바른 생활 사나이, 국민배우' 타이틀은 그저 얻어진 게 아니었다.

―영화를 자평(自評)한다면.

"이야기 연결고리가 약한 부분이 좀 있다. 괴생명체가 나오니까 허구에서 이야기를 시작할 수밖에 없고 허점이 생길 수 있다. 컴퓨터그래픽(CG)은 맘에 든다. 순수 우리 기술로만 다 했다는 데 큰 의미를 두고 싶다."

―가상의 공간에서 일하고, 있지도 않은 인물과 말하고 싸우는 것처럼 연기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98년 개봉한 '퇴마록'에서 경험은 해봤지만 이번 작품처럼 99％ CG 작업을 해야 하는 영화는 처음이다. (연기하는 대상의) 크기나 길이, 부피 등을 가늠하는 게 쉽지 않더라. 실제로는 30m만 뛰는 건데 영화에선 100m로 표현되는 식이니…. 실감 나는 연기를 위해 실제 괴물의 크기·부피와 비슷한 장치도 따로 만들었다."

―티셔츠 한 장 입고 하는 액션 연기에서 근육질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던데.

"워낙 가벼워서 잘 날아다닌다. 내 친구들 같으면 절대 못한다. 영화 때문에 따로 몸을 만들지는 않았고 평소 일주일 중 4~5일 정도는 1시간20분씩 뛰고 근력운동을 한다."

―대역은 안 썼나.

"드럼통에 세게 부딪히는 장면 말고는 대역을 쓰지 않았다. 촬영 마치고 집에 돌아갈 때부터 자기 전까지 계속 끙끙 앓았다. 아침에 일어날 때도 '끙' 하면서 힘들게 일어났다."

―오랜만의 악역이다.

"악인이라고 볼 수 없다. 괴물을 만들고 실수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지만 나쁜 의도를 갖고 한 짓은 아니다. 처음 봤던 시나리오에서는 정말 나쁜 사람으로 그려졌다. 사람이 너무 징그러워 매력이 없기에 감독한테 '나한테 잘 안 맞는 것 같다'며 출연을 고사했다. 감독이 시나리오대로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해서 배역을 받아들였다."

―배우가 악역을 하지 않겠다고 하면….

"한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선 좋은 역할로 좋은 얘기를 하고 싶다. 그리고 내가 악역을 하면 관객들이 당황한다. (선한 사람이라는) 고정관념이 생겨버려서 캐릭터에 대한 설명을 충분히 하지 않으면 관객들이 몰입하기가 힘든 거다. 앞으로도 악으로 시작해 악으로 끝나는 단순한 악역은 (하기) 힘들다."

―5세에 데뷔했으니 배우생활 50년이 넘었다.

"시대가 나랑 잘 맞았던 것 같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영화들이 사랑 얘기를 많이 해서 남자답고 잘생긴 배우들이 각광받았는데 80년대부터는 영화가 현실을 얘기하다 보니 서민적인 느낌이 드는 배우를 찾았다. 내가 말을 매끄럽게 하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진실해 보인다고 해서…."

―본인 스스로 잘생기진 않았다고 생각하는 건가.

"(턱을 괴더니) 분위기가 있지(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웃음). 매끄럽게 잘 생기진 않았으니까."

―최인호의 수필집 '인연'에 "안성기는 이가 좋지 않다"고 나온다.

"아역배우 시절 영화를 동시에 대여섯 편씩 찍어 언제나 피곤했다. 촬영장에서 초저녁부터 잠든 나를 깨우려고 어른들이 초콜릿을 줬다. 초콜릿을 입에 물려주면 좋아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닦을 새도 없이 다시 잠들어버리니까 나중에 이가 성치 않더라. 그때 이미 어른들 따라 화투도 치고 당구도 쳤다."

―'개인 안성기'의 삶은 어떤가.

"가족들과 여행 한번 다닌 적 없다. 영화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고 모든 시간을 영화에 내놓고 살았다. '나'가 없었다는 거다."

―영화는 언제까지 할 건가.

"할 수 있는 때까지 해야지. 시나리오 읽는 것부터 정신없는 촬영 현장까지 다 좋다. 영화를 위해 여러 사람이 힘과 마음을 합친다는 게 감동적이다."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는.

"언제나 준비를 많이 해야 한다. 안 그러면 단명(短命)한다. 자신을 단단하게 만들어놔야 기회가 왔을 때 잡을 수 있다. 준비된 사람은 금방 눈에 띄기 때문에 기회는 반드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