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에 비친 '모던 조선'] (48) 77년 전 터진 '조선 初有의' 저작권 소송 사건

1924년 1월 11일자 조선일보에 '저작권 침해로 항고'라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시내 모 고등보통학교의 교수로 잇는 황의돈(黃義敦)씨는 시내 삼청동 박해묵(朴海默) 김동진(金東縉)씨를 걸어, 저작권침해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고소를 제기하?든 바, 불기소가 되었으므로 다시 경성복심법원 검사국에 항고를 제기하야 방금 검사국에서는 사실을 엄밀히 조사하는 중이라는 데…."

'조선에서 처음있는' 저작권 소송을 알린 기사다. 보성고보 교수 황의돈은 당시 국내 최대 출판사이자 서점인 종로 덕흥서림 주인 김동진과 동업자 박해묵이 자신의 책을 베껴 출판했다며 고소했다. 그런데 당시 저작권 개념이 불확실한 때여서인지, 뒤늦게 황이 항고하면서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이날자 각 신문은 비로소 '조선 초유(朝鮮 初有)'라는 제목으로 이 사실을 일제히 전했다.

소송을 제기한 황의돈은 일제가 내선일체를 내세워 국사·국어 교육을 금지하자 1938년 학교를 그만두고 조선일보에 입사, 향토문화조사 사업을 벌이는 등 우리 역사와 문화 지키기에 나섰던 인물이다.

재판과정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황은 5년 전 조선 역사에 관한 저술 허가를 총독부에 제출했는데 '원고 내용 불온'을 이유로 인가를 받지 못하다, 원고를 뜯어고쳐 '신편 조선역사(朝鮮歷史)'라는 이름으로 출판했다. 나중에 김동진 등도 '반만년 조선역사(半萬年 朝鮮歷史)'라는 책을 냈는데, 어쩐 일인지 그 내용이 전부 황의돈의 것과 똑같았다. 이에 고소를 제기하면서, 일약 '조선 서적업계의 주목거리'로 떠오른 것. 알고 보니 총독부 검열국 관리로부터 황의 원고를 빼내 책을 출판했던 것이다.(1925년 1월 29일자)

우리나라에 저작권 개념이 처음 도입된 것은 조선의 외교권이 박탈된 뒤인 1908년, 미국과 일본 사이에 특허·의장·상표·상호·저작권에 관한 일미(日美)협약이 체결되면서부터다. 이 협약은 곧바로 내각고시로 반포됐고, 그대로 조선에도 적용됐다. 그러나 워낙 관련 시장이 좁아 그 개념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다가, 황의돈이 '거대 출판사'를 상대로 문제제기를 하면서 세상의 관심을 받게 됐다. 이 소송은 2년 넘게 끌었고, 공판이 열릴 때마다 주요 기사로 보도됐다.

경성지방 복심법원은 김동진과 박해묵에게 저작권 침해 혐의로 각각 벌금 100원씩을 선고했다. 그러나 황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두 사람을 상대로 9700원이라는 거액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1926년 5월 23일자) 결국 황이 배상금 500원을 받고 화해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저작권 소송은 문제제기 5년여 만에 일단락됐다.(1927년 4월 6일자)

'저작권 소송'을 당한 김동진 역시 자신이 펴낸 소설(옥루몽)을 다른 출판사가 베껴 출간했다며 소송을 제기(1924년 12월 4일자)하는 등, 이후 출판은 물론 음반, 영화 등에도 저작권 다툼은 확산돼 갔다.